연말의 소란을 지우고 채워 넣은 다정한 시간들
망막전막 수술이라는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본의 아니게 긴 휴가를 보내고 있는 요즘이다.
때마침 연말이라 아내도 내 보호자를 자처하며 며칠 연차를 냈지만, 오늘은 출근길에 올랐다.
홀로 남겨진 집, 평소와는 다른 고요함이 거실 가득 낮게 내려앉는다.
바쁜 출근 준비 와중에도 아내는 아이들 먹일 떡국 재료를 정성껏 준비해 놓고 집을 나섰다.
아내의 빈자리를 채우듯 냄비 앞에 서서 국물을 우려내고, 등교하는 아이들의 물통을 챙기며 하루를 시작한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떡국을 그릇에 담아 조금 식히는 사이, 아이들을 깨워 식탁 앞에 앉혔다.
평소엔 투닥거리기 바쁜 형제인데, 오늘따라 무슨 이야기가 그리 신나는지 숟가락은 멈춘 채 수다 삼매경이다. 그 모습이 예쁘면서도 학교 늦을까 봐 분 단위로 시간 경과를 알리는 내 목소리는 어느덧 아침의 일상적인 리듬이 되어 집안을 울린다.
우리 부부는 주 5일을 2대 3으로 나누어 아이들을 등교시킨다. 내가 담당인 날은 되도록 학교 정문까지 함께 걷는다.
쭉 이 동네에서 커서 아는 친구가 꽤 많이 생겨 쑥스러운 듯 친구에게 아침 인사를 건네는 초등 4학년 첫째와, 한시도 몸을 가만두지 못하고 종횡무진 뛰어다니는 초등 1학년 막내.
"차 조심해라", "오늘도 즐거운 학교생활 하라"는 평범한 인사를 등 뒤로 남기고 돌아서는 길, 아이들의 작은 어깨 위로 쏟아지는 아침 햇살이 유난히 투명했다.
평소라면 지옥철에 몸을 싣고 사무실로 향했을 시간이지만, 오늘은 집으로 돌아와 창문을 활짝 열었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집안의 탁한 공기를 밀어내는 사이 로봇청소기에게 일을 시키고, 청소가 끝난 뒤 마시는 커피 한 잔.
아직 눈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탓인지, 아니면 그동안 쌓인 긴장이 풀린 탓인지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한숨 자고 일어났더니 어느덧 점심시간이다.
혼자 먹는 점심, 밖으로 나가거나 배달을 시킬까 고민하다가도 가족 없이 혼자 성찬을 즐기기가 왠지 양심에 찔려 냉장고 속 사골국을 꺼냈다.
보글보글 끓인 만둣국 한 그릇으로 간단히 배를 채우고, 곰보배추 차 한 잔에 쿠키를 곁들였다.
유튜브로 어느 노부부의 삶을 다룬 인간극장을 멍하니 보고 있자니, 어느덧 첫째가 하교를 하고 학원 가기 전 집에 잠깐 들렀다.
입이 짧아 간식도 마다하는 녀석이 거실 한구석에서 책을 보고 레고를 만지작거린다.
지루해 보이는 아이에게 슬쩍 오목 한 판을 제안했다.
결과는 4전 3패.
살짝 봐주기도 했지만, 어느덧 아빠의 수를 읽고 허를 찌르는 아이의 모습에 묘한 민망함과 기특함이 교차한다. 그리고, 문득 내가 출근하고 없던 평소, 이 거실에서 아이가 혼자 무료하게 보냈을 시간들이 짐작되어 마음 한구석이 미안함으로 짠해졌다.
학원으로 향하는 아이를 배웅하고 키보드 앞에 앉았다. 글을 다 적고 나면 아까 다 못 본 노부부의 이야기를 마저 보다가 저녁 준비를 시작할 것이다. 오늘 저녁은 아내가 어제 미리 준비해 둔 닭다리 구이나 돼지고기 김치볶음 중 하나가 되겠지.
수술 때문에 회사의 어수선한 연말 분위기에서 잠시 비껴 난 것도 다행이고, 이렇게 전업주부의 삶을 짧게나마 체험하며 일상의 평온함이 주는 소중함을 느끼게 된 것도 감사하다.
이 요양 생활도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
따스한 겨울 햇살과 함께한 9일 차의 하루를 이렇게 기록으로 남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