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남자의 강릉

by 아저씨의 뒷주머니

재작년, 첫째와 단둘이 강릉으로 떠난 적이 있었다.

어린 둘째 때문에 부쩍 소외감을 느끼던 첫째의 마음을 다독여주기 위한 일종의 '비밀 회동'이었다.

아들과 단둘이 떠났던 그 시간은 아들이 있는 아빠만이 누릴 수 있는 약간의 특권처럼 느껴졌고, 여행 이후 한동안 이어졌던 평화로운 일상은 내 마음 한구석에 여전히 소중한 조각으로 남아 있다.

최근, 방학임에도 매일 아침 돌봄 교실로 향하는 아이들의 뒷모습이 유독 짠하게 다가오는 날이 있었다.

내가 어릴 적 방학은 학교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는 온전한 자유의 시간이었는데, 맞벌이가 일상인 요즘 아이들에게 방학은 장소만 바뀐 또 다른 일과일지도 모른다는 미안함이 들었다.

뉴스에서는 돌봄 교실에 선정되는 것이나 식사 제공이 어렵다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데, 그나마 우리 아이들은 둘 다 보낼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의 무거움은 가시지 않았다.

결국 그 짠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 급하게 남자 셋만의 여행을 꾸렸다.

목적지는 첫째와 단둘이 갔었던 강릉. 사실 겨울 바다가 보고 싶었던 아빠의 사심이 듬뿍 반영된 선택이었다.

출발하는 날 아침, 강릉을 향해 출발한 차 안은 생각보다 평온했다. 평소 같으면 사소한 일로 투닥거렸을 아이들도, 먼 길 운전하는 아빠의 기운을 살피는지 적당한 긴장감 속에 평화를 유지해 주었다.

첫 번째 목적지는 주문진의 '철뚝소머리국밥'이었다. 다행히 재료 소진 직전에 도착해 세 남자의 허기를 채울 수 있었다. 뽀얗게 우려낸 진한 국물 속에 듬뿍 담긴 야들야들한 살코기는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뜨끈한 국물 한 숟가락에 아이들의 얼굴에도 기분 좋은 온기가 돌았다.

배를 채우고 나선 주문진 해수욕장은 겨울 바다의 정석 그 자체였다. 거센 바람과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그리고 낮게 가라앉은 흐린 하늘. 눈이라도 흩날렸다면 더할 나위 없었겠지만, 아이들은 그 추위 속에서도 조개껍질을 줍느라 여념이 없었고 나는 잠시 그 풍경을 렌즈 삼아 깊은 사색에 잠겼다. 다만 살을 에듯 추운 날씨 탓에 그 풍경을 오래 붙잡아 두지는 못했다.

그다음으로 정동진역으로 이동해 레일바이크에 올랐다. 언제 와봤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정동진역의 철길 위로 열차가 들어오는 모습은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예전 첫째가 아주 어릴 적엔 내 허벅지가 터지도록 페달을 밟았던 기억이 있는데, 어느새 전동식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래도 중간중간 힘을 보태야 하는 구간에선 아이들에게 실컷 페달을 밟게 했다. 뒤에서 아이들의 기운찬 발길질을 보며 나는 모처럼 풍경을 즐기는 사치를 누렸다.

다음으로 찾은 강릉 중앙시장은 일요일 늦은 오후임에도 인산인해였다. 주차장을 두 바퀴나 돌고서야 겨우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먹거리 골목에서 닭강정을 먼저 챙기고, 아이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의외로 '감자뭉팅이'집이었다. 20분 넘게 기다려 맛본 핫도그와 오리지널 뭉팅이는 기다림을 보상하기에 충분했다. 쫀득쫀득한 감자의 식감이 입안을 즐겁게 했다.

저녁 식사는 강릉의 노포 중식당인 '고려반점'에서 해결했다. 두툼한 등심을 숭덩숭덩 썰어 튀겨낸 탕수육이 이곳의 시그니처인데, 아이들은 정작 곱빼기로 시킨 짜장면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단다. 아빠의 추천보다 본인들의 직관을 믿는 역시나 청개구리들이다.

숙소로 돌아와서는 지하 전자오락실에서 한바탕 전쟁을 치렀다. 공짜 게임기에 영혼을 바친 아이들의 모습에 헛웃음이 났다. 이어 첫째와 탁구를 쳤는데, 어느새 부쩍 늘어난 녀석의 실력에 깜짝 놀랐다. 아이들은 내가 알아채지 못한 순간에도 매초 성실하게 자라고 있었다는 게 새삼 느껴졌다. 놀만큼 놀고 나서 사우나에서 따뜻하게 몸을 녹인 뒤, 방에 올라와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TV 시청 시간을 가졌다.

'톰과 제리'를 보며 깔깔대는 아이들 앞에 낮에 산 닭강정을 펼쳤다. 그런데 세상에, 그 많은 양을 순식간에 비워버렸다. 무서운 성장기 '먹깨비'들의 식성을 보며 앞으로 아빠의 뒷주머니가 더 든든해야겠다는 행복한 걱정이 들었다. 그렇게 아이들은 소원대로 실컷 TV를 보다 깊은 잠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창밖에는 소복하게 눈이 쌓여 있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아이들의 성화에 다시 한번 오락실과 탁구장을 찍고 나서야 숙소를 떠났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 눈꽃이 만발한 강원도의 산세는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하지만 경기도에 접어들자마자 거짓말처럼 햇살이 비치고 눈은 자취를 감췄다. 마치 다른 세계를 여행하고 돌아온 기분이었다.

서둘러 서울로 돌아온 이유는 결국 아이들의 학원 시간 때문이었다.

보강 일정을 새로 잡는 것이 더 큰 일인 현실이 조금은 씁쓸했지만, 이것 또한 우리 가족이 마주한 삶의 단면일 것이다. 서울에 도착해 단골 순댓국집에서 뜨끈한 국물로 무사 귀환을 자축하며, 우리는 봄이 오면 다시 한번'남자들만의 여행'을 떠나기로 약속했다.

특별한 명소나 화려한 액티비티는 없었지만, 돌봄 교실의 일상 속에 이 짧은 1박 2일이 아이들의 기억 속에 따뜻한 '겨울 방학의 조각'으로 남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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