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가가 모두 지방인 우리 부부는 아이들이 어렸을 때 주변의 도움을 받을 길이 없어 무척이나 힘들었던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라니, 양가가 지방에 계시다는 점이 뜻밖의 장점이 될 때가 있다.
바로 방학 때마다 일주일간 아이들만 보내는 일명 '양가 투어'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학원과 부모의 잔소리에서 해방되는 자유를 누리고, 우리 부부는 일상에서 벗어나 오롯이 둘만의 시간을 갖는 윈윈(Win-Win)의 시기. 아이들이 조부모님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을 동안, 우리는 휴가를 내어 여행을 떠나거나 평소 아이들과 가기 힘들었던 곳에서 외식을 하고 미뤄둔 친구들을 만나며 해방감을 만끽하곤 한다.
이번 겨울방학 양가 투어 시즌은 연초라 휴가를 길게 내기 어려웠다. 무엇을 할까 고민하던 중, 아내가 먼저 선전포고를 했다. 내가 휴가를 못 낸다면 본인 혼자라도 제주도 당일치기 여행을 다녀오겠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묘한 배아픔과 함께 도무지 혼자 보낼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결국 아이들을 처가에 맡기고 근처 지방 공항에서 제주로 향하는 1박 2일 번개 여행을 계획했다.
서로의 요구사항은 명확했다.
아내는 오름과 미술관 방문 그리고 전복돌솥밥, 나는 고기국수, 공통적으로는 맛있는 회 한 접시.
토요일에 아이들과 처가에 방문해 하룻밤을 보낸 후, 일요일에 아내와 공항으로 나섰다. 물론 아이들에겐 비밀이다. 버스터미널과 같은 소박한 공항을 통해 제주에 도착해 렌터카를 빌리니 오후 3시경. 동문시장에서 오메기떡도 사 먹고 숙소로 가는 길에 있던 군산오름에도 올랐다. 저녁에는 근처 식당에서 맛있는 방어와 고등어회에 오랜만에 회포를 풀었다.
하지만 진짜 여행은 다음 날부터였다. AI 추천만 믿고 찾아간 미술관이 하필 휴관이었던 것이다.
갑작스럽게 거대한 여유 시간이 우리 앞에 툭 떨어졌다. 일단 근처 맛집에서 갈치국으로 해장을 하고 근처에 있는 정방폭포에 갔다. 수학여행 때나 가봤으려나. 그러고 나서 좀 먼 곳에 있는 전복돌솥밥집에 가서 점심까지 먹었다. 그다음엔 특별히 할 게 없어서 해안도로를 따라 드라이브를 하며 카페에 들르기로 했다. 그 사이 풍경이 좋은 곳에서 멈춰 구경했고, 분명 한겨울인데 벌써 유채꽃이 핀 곳도 발견했다.
그렇게 도착한 카페에서 한참을 멍을 때리고 나선, 협재해수욕장에 갔다가 돌고래를 보자고 해서 애월 돌고래 전망대에 가서 또 한참을 멍을 때렸다. 돌고래는 못 봤다. 이어 검은 모래의 알작지 해변에서 또 한참을, 공항에 조금 일찍 도착해서는 면세점을 돌고 또 한참을 '멍'하게 있었다.
이렇게 연속되는 시간 속에서 나는 본능적으로 아내에게 "그럼 이 다음에는?"을 계속 묻고 있었다.
극 J에게는 너무나 힘든 무계획의 여행이었다.
아내는 말했다. 아이들 없이 즐기는 이 여유를 누리라고, 본인은 지금 너무 여유롭고 좋다고.
아내가 좋다니 다행이었지만, 솔직히 나는 그 여유를 온전히 누리지 못한 것 같다. 카페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면서도, 해변에서 파도 소리를 들으면서도 머릿속에서는 '다음엔 뭘 해야지?', '언제 제주도 다시 올지 모르는데, 뭘 더 해야 할까?'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마음이 끊임없이 다음 칸으로 넘어가려 했다.
나는 '쉬는 것'조차 계획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여행지에서도 체크리스트를 만들고 동선을 짜서 움직여야 무언가 해냈다는 성취감이 든다. 그런데 아내는 달랐다. 아무것도 안 해도 괜찮고, 그냥 함께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했다. 같은 풍경을 보면서도 우리는 전혀 다른 여행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앞으론 아이들이 더 크고 우리 부부 둘이 보내는 시간이 늘어날 텐데, 나는 그 시간을 제대로 즐길 준비가 되어 있는 걸까?"
결혼 전에는 연애를, 아이가 태어난 뒤에는 육아를 고민하며 달려왔지만 정작 '부부가 함께 잘 노는 법'은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이들이라는 공동의 미션을 수행하느라 정작 둘만의 속도를 맞춰본 경험이 턱없이 부족했다는 사실을 제주 바다 앞에서 깨달았다.
아내와 나는 다른 사람이다. 여행 스타일만 봐도 그렇다.
이제는 나의 속도를 버리고 아내의 속도에 맞춰가는 연습이 필요할 것 같다.
아내가 멍을 때릴 때 나도 기꺼이 함께 멍해질 수 있는 느긋함, "다음은?"을 묻기 전에 "지금 이 순간"을 즐기는 여유.
언젠가 아이들이 완전히 독립하고 우리에게 둘만의 긴 시간이 찾아왔을 때, 서로를 마주 보며 어색해하지 않으려면 지금부터 부지런히 연습해야겠다.
'잘 노는 법', 이것이야말로 중년에 마주한 가장 중요한 인생 숙제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