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에 겪은 대상포진 후기를 뒤늦게 정리합니다>
40대가 되면 몸이 보내는 신호가 달라진다고들 한다. 20대엔 '오늘 좀 무리했네~' 정도였던 게, 40대엔 '야, 너 이러다 큰일 난다?'로 바뀐다.
그리고 그놈의 경고는 꼭, 예고편도 없이 본편으로 직행한다.
대학원 공부를 다시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뼈저리게 느낀 건 뇌 용량의 한계가 아니라 '체력의 방전 속도'였다. '오랜만에 안 쓰던 머리를 굴려서 그런가?', '그래, K-직장인에 육아, 학업까지... 슈퍼맨 코스프레 중이니 힘든 게 당연하지. 이 악물고 버티면 익숙해질 거야.' 스스로를 가스라이팅하며 버텼다.
하지만 첫 중간고사를 준비하며 장시간 책이나 자료를 보다 보면 시야가 흐려지다가 결국 잘 보이지 않게 되는 게 심상치 않았다. 병원에 갔더니 의사 선생님께서 담담하게 말씀하셨다. "노안이시네요."
그래... 40대 초중반... 어쨌든 40대다. 각오는 하고 있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얼굴의 노안보다 눈의 노안이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거울 속 주름은 '세월의 연륜'이라 포장할 수 있지만, 눈의 노안은 그냥... 기능 저하다. 포장이 안 된다.
어쨌든 살아야 했기에(!?) 다초점 렌즈를 맞췄다. 40대가 되었을 때보다 왠지 더 슬펐다. 마흔은 숫자였지만, 다초점 렌즈는 현실이었다.
그렇게 노안이라는 첫 번째 파도를 넘고, 뭐 별일 없이(흰머리 뽑기, 영양제 개수 늘리기 같은 소소한 노화 활동은 디폴트니까) 올해를 맞이했다.
올해 맡게 된 새로운 업무는 나에게 무에서 유를 발굴해내는 창조적인 역할을 요구했고, 새로운 팀장님은 퀄리티 있는 결과물을 주기적으로 생산하길 원하셨다. 작년 팀장님은 전략적으로 할 때는 하고 필요 없을 때는 안 하고, 이게 가능했는데... 새로운 팀장님은 AI처럼 본인이 (맘속에) 정해놓은 기한을 맞춰주길 부드러운 방식으로 요구하셨다. '부드러운 방식'이라는 게 포인트다. 화를 내시는 것도 아니고, 재촉하시는 것도 아닌데... 어쩐지 더 압박이 됐다.
규격화된 업무에 최적화되어 있던 나에게 '주기적인 창조적 결과물 생산'은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대학원 과목들은 난이도가 수직 상승했다.
그래도 나는 '러너(Runner)'니까. 훗~ 달리기로 땀 빼고 심신을 단련하면 스트레스 따위 날아갈 거라 믿었다. 마침 고구려 마라톤 이후 폼도 좀 올라온 것 같아 운동 강도를 높이던 시기였다.
역시 옛말 틀린 거 하나 없다. 과유불급(過猶不及).
금요일이었나 토요일이었나. 속이 더부룩하니 소화가 안 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더니 왼쪽 상반신 특정 부위가 근육통처럼 쑤시기 시작했다. 딱히 운동을 격하게 한 기억도, 어디 부딪힌 기억도 없는데. 하루 자고 나면 낫겠지 했던 통증은 일요일이 되자 '나 여기 있어요!' 하고 존재감을 폭발시켰다. 교회에 가서 앉아있는데 설교 말씀이 귀에 안 들어왔다. 은혜받으러 갔다가 고통만 받고 있었다.
와이프가 힘들어하는 나의 표정을 보고 병원에 가야 하는 거 아니냐고 했는데, 딱히 왜 아픈지 나도 원인을 모르겠는데 병원 가기가 좀 꺼려졌다. "선생님, 그냥 여기가 아파요"라고 말하기엔 40대 남자의 헛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달까.
그러다가 갑자기 퍼플렉시티에 내 증상을 한번 물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소화가 잘 안 되는 것처럼 아프다, 몸살 증상이 있다가, 왼쪽 상반신에 근육통이 있고..."라고 프롬프트를 입력하니, AI가 대상포진 증상이라 판단된다며 병원에 가보길 권했다.
'내가 몇 살인데 벌써 대상포진??? 그리고 몸에 포진도 없는데??'
반신반의했지만, 어쨌든 통증이 계속 심해져갔기 때문에 문을 여는 내과를 간신히 찾아갔다.
처음엔 의사 선생님도 내 증상만 듣고 고개를 갸웃거리셨다. 소화기 문제인가 싶어 배만 눌러보시기에, 용기를 내어 말했다. "저기... 싫어하실 것 같지만, 사실 AI에게 물었는데 대상포진 증상 같다고 했거든요."
진료실 공기가 살짝 싸해졌다. 선생님 표정이 '요즘 환자들이 참...'에서 3초 후 '어...진짜네?'로 바뀌었다. 내 상반신을 다시 한번 주의 깊게 살피시더니, 내 눈에도 잘 식별이 안 되는 포진을 발견하셨다. 선생님도 충격받으셨을 듯.
병명이 확진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통증이 풀악셀을 밟았다. 마치 "이제 들켰으니 본색을 드러내 주마!" 하는 악당처럼. 대상포진은 신경에 숨어있던 수두 바이러스가 면역력이 떨어지면 신경길을 따라 난동을 부리는 병이란다. 나는 하필 왼쪽 척추에서 가슴으로 뻗는 신경 줄기를 탔다. 그나마 얼굴로 안 온 게 천만다행이지.
전염될까 봐 아이들과 격리조치 당했다. (솔직히 이건 좀... 좋았다. 아주 잠깐의 해방감?) 하지만 그걸 즐기기엔 너무 아팠다. 회사도 일주일이나 못 나갔다. 송곳으로 후벼파는 고통에 밤새 뒤척이며 지옥 같은 일주일을 보냈다
목구멍이 포도청인 K노비 신세다 보니 더 이상 회사를 쉬기가 눈치가 보였다. 그 당시에 보고서를 작성하던 게 있었는데, 대상포진을 앓아본 경험이 없는 AI 팀장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저는 안 앓아봐서 모르는데, 많이 아픈거라면서요... 그런데 내일은 나오실 수 있나요?"
이 말에는 악의가 없다는 걸 안다. 진심으로 없다(그는 감정없는 AI이니까). 그래서 더 아팠다. 이런 전화를 두 번 정도 받았다.
결국 월요일에 좀비처럼 출근했고... 예상대로 화요일에 다시 뻗었다. 사무실 의자에 앉아있는데 수시로 찾아오는 송곳 테러를 견딜 재간이 없었다. 다행히 며칠 더 쉬고 나니 의자에 엉덩이 붙이고 앉아있을 정도는 회복되어 복귀했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가 찾아왔다. 통증이 가시니, 그 자리에 가려움증이 온 것이다.
몸을 미친 사람처럼 박박 긁었다. 사무실 내 자리에서도 박박 긁고, 학교 수업 시간에도 박박 긁었다. 사무실은 그래도 칸막이라도 있지... 학교에서는 정말 미친 사람처럼 긁어댔다.
그리고 진짜 웃긴 건, 스트레스를 받으면 더 가려웠다는 거다. 팀 회의 길어지면 박박 긁어댔고, 특히 영어로 진행된 강의 시간에는 정말 쉬지 않고 긁어댔다. 본의 아니게 스트레스의 바로미터가 되어 동료들과 동기들에게 웃음을 주었다. 나를 보며 "오늘 심했나 보네"라고 눈빛을 교환하는 동료들. 덕분에 회의 분위기를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었다.
그렇게 총 한 달이 되자 가려움증도 사라지고, 컨디션도 올라왔다. 그리고 러닝도 두 달가량 못 하게 되자 살도 포동포동 올라왔다. 러닝을 쉰 것도 억울한데 살까지 찌다니.
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왠지 스트레스받는 환경이 걱정되어 대상포진 예방접종을 알아본 적이 있다. 그때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아직 젊으신 분이 왜 이런 걸 맞으려고 해요. 이런 건 50대 넘어서 맞으세요."
그때는 '그래, 나 아직 젊지'라고 생각했는데... 내 몸은 이미 50대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거다.
물론 요즘 젊은 세대들도 높은 스트레스 때문에 종종 걸린다고 하지만... 노안에 이어 노화에게 두 번째 뒷통수를 맞게 되었다.
앞으로도 더 적겠지만, 올해 유독 노화의 뒤통수 공격이 매섭다. (이제는 유쾌한 표현이 아니지만) 영포티의 삶을 걸어보고자 이리저리 발버둥 쳐도, 몸속 장기들은 정직하게 내 나이를 카운트하고 있었다. 여기저기 삐그덕댄다고 신호를 보내는 내 몸. 나이 듦이 서글프고, 힘들고, 무엇보다 너무 '아팠던' 잔인한 5월이었다.
하지만 뒷통수를 맞아도 일어나는 게 40대 아니겠나. 아니지... 일어나야만 하는게 40대의 숙명이 아니겠는가.
다만 일어나는 속도가 좀 느려졌을 뿐. 그리고 일어날 때 '윽' 소리가 나올 뿐이다.
오늘도 다초점 안경을 고쳐 쓰고, 대상포진이 휩쓸고 간 자리를 한 번 쓰다듬으며, 무거운 몸을 일으켜 본다. 전국의 모든 아저씨들, 아프지 말고 파이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