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sic Insight]토요일 밤의 추억을 연주하다

제리 멀리건 섹스텟의 기타리스트, 짐 홀(Jim Hall)

by 에디터 엉클신

지난 글에서 소개한 제리 멀리건의 <Night Lights>가 선사한 '어둠 속의 위로', 어떠셨나요?


그 앨범의 1번 트랙을 다시 한번 떠올려 봅니다. 바리톤 색소폰의 묵직한 독백 뒤로, 물안개처럼 피어오르던 나른한 기타 소리를 기억하시나요? 과시하지 않고 색소폰과 피아노 사이를 조용히 유영하던 그 연주자.

그가 바로 오늘 소개할 거장, 짐 홀(Jim Hall)입니다.

Jim Hall / 출처 : Wikipeida Commons


제리 멀리건 섹스텟(Sextet)의 멤버로 도시의 밤을 연주했던 그가, 이번에는 우리의 '유년 시절'을 소환합니다. 1980~90년대, 온 가족이 TV 앞에 모여 숨죽이며 기다리던 <토요명화>의 시그널 음악. 바로 호아킨 로드리고의 '아랑훼즈 협주곡(Concierto de Aranjuez)'입니다.


KBS <토요명화> 오프닝 / KBS 뉴스 화면 갈무리

오늘은 제리 멀리건의 밤(Night)에서 걸어 나와, 짐 홀이 들려주는 두 가지 색깔의 '아랑훼즈'를 만나봅니다.


1. 따뜻한 기억 : 짐 홀 & 데이비드 매튜스 오케스트라 (Jim Hall & David Matthews Orchestra) (1981)

먼저 소개하고 싶은 앨범은 우연히 발견한 보석, 1981년작 <Jim Hall & David Matthews Orchestra>입니다. 짐 홀의 대표 앨범으로 꼽히진 않지만, 이 앨범의 미덕은 '풍성함'입니다. 제목 그대로 오케스트라의 현악기(Strings) 사운드가 짐 홀의 담백한 기타를 포근하게 감싸 안습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토요명화>의 시그널(베르너 뮐러 오케스트라 버전)도 웅장했죠. 데이비드 매튜스의 편곡은 그 웅장함을 유지하되, 짐 홀의 기타가 등장하는 순간 분위기를 반전시킵니다. 거대한 오케스트라 앞에서 짐 홀은 기교를 부리는 대신, 힘을 툭 빼고 멜로디를 던집니다.


가장 화려한 순간에 가장 담백해질 줄 아는 거장의 여유. 그 여백 사이로 우리의 어린 시절 기억이 스며듭니다. TV 앞에서 영화를 기다리던 설렘, 가족들의 온기 같은 것들 말이죠.


2. 차가운 지성미 : 짐 홀 <Concierto> (1975)

앞선 앨범이 오케스트라의 풍성함을 선사했다면, 반드시 들어야 할 1975년작 <Concierto>는 우리들의 추억을 '위대한 예술'로 승화시킵니다.


이 앨범은 재즈 역사상 가장 완벽한 '어벤져스'가 모인 명반입니다. 라인업만 봐도 현기증이 날 정도죠.

- Guitar: 짐 홀 (Jim Hall)

- Trumpet: 쳇 베이커 (Chet Baker)

- Alto Sax: 폴 데스몬드 (Paul Desmond)

- Bass: 론 카터 (Ron Carter)

- Drums: 스티브 갯 (Steve Gadd)


19분이 넘는 대곡 'Concierto de Aranjuez'에서 이들은 '쿨 재즈(Cool Jazz)'의 정점을 보여줍니다. 오케스트라 버전이 '뜨거운 감동'이었다면, 이 앨범은 '서늘한 슬픔'입니다.

곡의 중반부, 짐 홀의 기타 솔로가 끝나고 이어지는 폴 데스몬드의 색소폰과 쳇 베이커의 트럼펫이 주고받는 대화(Interplay)를 놓치지 마세요. 질척거리지 않습니다. 마치 잘 재단된 수트를 입은 신사들이 건조한 목소리로 이별을 이야기하는 듯합니다. 감정을 절제해서 더 사무치는, 역설적인 미학이 여기에 있습니다.


3. 왜 우리는 이 선율에 무너지는가

인문학적으로 볼 때, 로드리고의 '아랑훼즈 협주곡'은 한국의 '恨'의 정서와 맞닿아 있습니다.

원작자인 로드리고는 유산된 아이와 아픈 아내를 지켜보며 기도를 담아 이 곡을 썼다고 합니다. 그 간절한 슬픔이 멜로디 깊숙이 박혀 있기에, 수십 년이 지나 한국의 <토요명화>를 보고 자란 우리에게도, 1975년 뉴욕의 재즈 뮤지션들에게도 똑같은 울림을 줍니다.


짐 홀은 제리 멀리건과 함께할 때도 그랬듯, 이 슬픈 멜로디를 기타 줄을 뜯는 것이 아니라 마치 "눈물을 삼키듯" 연주합니다. 그래서 그의 연주는 화려하지 않아도 깊습니다.


4. 마치며 : 어른이 된 당신에게

토요일 밤, TV 앞의 꼬마였던 우리는 이제 고독을 즐길 줄 아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제리 멀리건의 <Night Lights>가 불 꺼진 밤의 친구였다면, 짐 홀의 <Concierto>는 해 질 녘의 친구가 되어줄 것입니다.


오늘 밤은 이 두 가지 버전의 아랑훼즈를 연달아 들어보시길 권합니다. 하나는 그때 그 시절의 나를 위로해 줄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의 나를 안아줄 것입니다.


Listening Tip

- Jim Hall & David Matthews Orchestra (1981):

그리움이 사무칠 때, 영화 같은 웅장함과 따뜻함이 필요할 때.

- Jim Hall - <Concierto> (1975):

혼자 있는 밤, 와인이나 위스키를 곁들이며 '소리의 질감'에 집중하고 싶을 때. 쳇 베이커의 숨소리까지 들릴 듯한 적막함을 즐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