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과 함께 견뎌내기
'코로나19'와 '우울감(blue)'을 합쳐서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한 일상의 큰 변화로 생긴 우울감이나 무기력증을 뜻하는 '코로나 블루'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난 낙관적이었던 건지, 혹은 지나치게 순진무구했던 건지 코로나가 언젠가는 종식될 거라 생각했었다. 그리고 지금, 이제는 With 코로나 시기임을 인정하게 되었다.
코로나와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여전히 익숙지 않아 문득 몹쓸 감성에 젖을 때에는 동네 아이들이 마스크를 쓴 채로 뛰어노는 것을 볼 때, 조그마한 꼬마 아이가 보호자의 손을 잡고 마스크를 쓰고 아장아장 걷고 있는 것을 볼 때, 걷기도 힘드신 노인분들이 마스크를 쓰고 한 걸음 한 걸음 지나가실 때, 괜스레 마음 한편이 씁쓸해질 때가 있다.
대체 세상이 왜 이렇게 된 걸까, 마스크를 벗고 생활할 수 있는 날이 오기는 할까라는 물음을 던지며.
그래서 우리는, 아니 나는 코로나와 '함께' 살아가는 게 아니라 코로나 시대를 '견디어 내는 것'이라고 쓰고 싶다. 그 누구도 원치 않았던 결과를 꾸역꾸역, 어쩔 수 없이 계속해서 버티면서 살아 나가는 상태니까.
모두가 어려운 이 시기에 잠시나마 재택근무를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집에만 있을 때는 무기력해지고 온갖 잡생각이 밀려든다. 본래 생각이 많고 한번 깊은 생각의 늪에 빠지면 사람과 존재의 이유, 우주의 심연, 인류의 종말까지 생각하는 정신적 과잉 활동인이라 무기력함이 밀려오기 시작하면 곧이어 우울감이 찾아온다.
그래서 1년 만에 브런치를 다시 찾았다. 글과 함께 코로나 시대를 잘 견뎌내 보기 위해서.
코로나 시대의 단편적 모습을 한 벽화가 잘 표현해주고 있었다. 우리는 이제 모두 마스크를 쓴다. 이제 태어난 아이들은 마스크는 원래부터 썼던 것으로 생각하며 자란단다. 연인들은 흔히 말하는 '마스크 키스'를 한다. 직장에서 혹은 친구들과의 모임도 때로는 화상으로 진행된다.
익숙했던 풍경이 아주 빠르게 바뀌어 간다.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소중한 것, 익숙한 것은 잃어봐야 그 소중함을 알게 되는 거라고. 비단 인간관계에 있어서만 맞는 말이 아니었다. 공기처럼 물처럼 익숙했던 것들을 잃고 나니 코로나 이전 우리의 모습이 무척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