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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퍼유의 밀린 일기

ep.32 어차피 모든 건 사람이 하는 일

by 페퍼유

내가 치프바이어가 되고, 팀에도 조금의 변화가 있었다. 빈 한자리로 다른 팀에서 후배 한 명이 발령 나서 합류하게 되었는데 바잉 경험은 없었지만 여성복 출신이어서 이해도가 높은 친구였다.


문제는 그 시기가 너무 바빴다는 것. 빈자리를 채워가며 일하느라 업무는 이미 포화 상태였고, 출장도 앞두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인수인계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속도로 필요한 것 위주로 던져주고, 바로 실무로 투입시켰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지나갔다.


6개월쯤 지나, 그 후배가 어느 정도 자리 잡아 보이는 시점에 면담을 했다.
힘든 건 없는지, 재미는 있는지 물었더니 그 후배가 말했다.

“이제야 바잉 프로세스가 좀 이해가 되는 것 같아요. 처음엔 국내 브랜드 프로세스와 달라서 힘들었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뜨끔했다. 나도, 팀원들도 오랫동안 비이커에서 시작해 자연스럽게 ‘막내 루트’를 밟아왔기 때문에 처음부터 프로세스를 자연스럽게 몸으로 익혔다. 하지만 그 후배는 다른 방식으로, 다른 일을 하던 팀에서 넘어온 사람이었다. 큰 틀을 먼저 알려주고 잡아줬어야 했는데, 바쁘다는 이유로 당장 급한 실무부터 던지고 있었다.

급작스럽게 더 큰 위치의 일을 하게 된 나도 적응하느라 애먹었는데, 다른 팀에서 온 친구는 오죽했을까.


어느 날은 다른 후배가 면담을 요청했다.

“선배 제가 왜 이 일을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다음 시즌을 준비하며 현 시즌 리뷰 자료를 만드는 일이었는데, 데이터 추출부터 작업까지 시간이 꽤 걸리는, 전통적으로는(?) 막내들의 몫으로 여겨지는 업무였다.
나는 이 자료를 만드는 게 공부도 되고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해서 그 후배에게도 일을 맡겼지만, 그 친구 입장에서는 오랜 시간 한 팀에서 일하며 한 단계 올라왔는데도 예전 ‘막내 일’처럼 느껴지는 업무를 다시 맡게 되자 서운했던 모양이었다. 왜 그 일을 막내들에게 다 주지 않고 같이 맡겼는지 나의 생각을 얘기해 주자, 그제야 오해했다며 미안하다고 했다.


그때 문득 깨달았다.
내가 치프바이어라는 새로운 롤에 적응해야 한다는 핑계로, 정작 제일 중요한 ‘사람’을 제대로 보고 있지 못했다는 것을. 난 우선 '내가 잘해야 알아서 다들 잘 따라올 것이라' 생각만 하고 각기 다른 구성원들의 고민을 귀 기울여 들어보지 않았다. 나 혼자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닌데.


회사라는 공간은 조직과 개인의 합으로 굴러간다.
하지만 그 안에서 각자가 바라는 목표의 높이와 깊이는 모두 다르다.
어떤 사람은 더 빠르게 뛰고 싶고, 어떤 사람은 차분히 오래 걷고 싶어 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엔 나처럼 아예 다른 길을 찾아갈 수도 있고.


나는 이걸 뒤늦게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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