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퍼유의 밀린 일기

ep.37 퇴사는 처음이라 (부제 : 아름다운 이별하는 방법)

by 페퍼유

퇴사를 결심하고 나는 머리로는 ‘어떻게 아름답게 마무리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사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내 맡은 바 임무를 다 하고 나오는 것. 24SS 시즌을 잘 운영하며 24FW 시즌 오더를 잘 마무리하는 것이었다.

막상 퇴사를 할 생각을 하니 부푼 마음이었지만, 오더 후 6개월 후부터 판매 실적을 알 수 있는 바잉의 특성상 ‘내가 지금 이 오더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퇴사하고 나서 욕먹겠다’ 초인적 집중력이 나왔다.


그렇게 만발의 준비를 하고 2024년 3월, 파리로 향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하루에 7~8개의 브랜드 미팅으로 정신이 없었다. 오랫동안 봐온 해외의 브랜드와 세일즈 친구들에게 “나 이게 마지막 출장이야”라고 너무도 말하고 싶었지만 아직 회사에 알리지 않았기에 꾹 참았다.


출장에서 돌아가자마자 퇴사를 말씀드려야지 생각했는데, 같이 출장지에 있던 누군가의 얘기를 듣고 내가 빨리 퇴사를 얘기해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리곤 출장 3일 차쯤 모든 일정을 마치고 팀장님께 전화를 걸었다.

“저 퇴사를 해야겠어요.”

나는 나의 의사가 바뀌지 않는다면 하루라도 말씀을 드리는 게 낫다는 판단하에 전화로 의사를 전달했는데,

결론적으로 이게 굉장히 잘못된 방법이었다. 약간 카톡으로 이별을 전달하는 거와 비슷한 거랄까.

이제와 서도 내가 가장 후회하는 부분이다. 아름다운 이별엔 정중하고 신중한 절차가 필요하다.


방법은 다소 잘못되었지만 퇴사 의사를 공식적으로? 전달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밤 9시 비행기로 한국에 돌아가기 전 3시간의 자유시간이 있었는데,

이게 내가 비이커 바이어로 오는 마지막 파리 출장이라고 생각하니 뭘 해야 할지 고민이 됐다.

그리고 나는 내가 좋아하는 피노컬렉션에 가서 전시를 보고 혼자 샴페인을 마셨다.

5EA2DB62-4801-497F-8B47-79AA4605CC27_4_5005_c.jpeg 날씨가 참 좋았네

(당분간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파리 출장을 6개월 후 사업자의 신분으로 다시 가긴 했지만)

아직도 혼자 샴페인 마시며 괜히 혼자 센티해졌던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0A6E1746-19C3-4D96-8EA6-7A8F04DE45F3_4_5005_c.jpeg 비이커 마지막 출장 기념 셀카도 하나 남기고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아주 정신이 없었다.

그럴 법도 한 게 오더를 넣어야 해서 할 것도 많은데 나는 처음 해보는 퇴사 프로세스(면담 또 면담)를 병행해야 했다.

“후회하지 않겠냐” “다시 생각해 봐라”라는 물음들에 나의 대답은 변하지 않았다.


“후회할 수도 있겠지만 우선은 퇴사할래요.”



작가의 이전글페퍼유의 밀린 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