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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산코끼리 Jul 16. 2016

반바지를 입고

기온 30도, 습도 85% 

하루에 2~3시간씩 내가 들어가 있는 챔버의 온도와 습도이다.

땀을 많이 흘리지 않는 편인데도 그 공간에서는 어김없이 온몸이 젖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회사에서 반바지를 입을 수 있게 되었다. 

나에겐 참 기쁜 소식이었다. 

몇 개 없는 반바지 중 하나를 골라 입었다. 

그래도 좀 덜 더울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가벼웠다. 


오늘 아침 출근시각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반바지를 입고 출근한 나를 보며 B가 회사를 비판했다. 권위주의가 깊이 뿌리 박힌 이 회사에서 반바지만 입게 해준다고 뭐가 바뀔 것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요지였다. 이 대목에서 그는 자신이 약자를 대변해주기라도 하는 듯이 열의를 다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그는 분명 이런 뜻으로 이야기한 것이다. "나는 수평적인 조직 구조를 원하고, 혁신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만 그런 것은 인사제도의 개혁 따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나와 같은 생각을 갖지 못한 고위급 임원과 사장단이 존재하는 한, 권위주의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B는 회사를 비판하며 모니터에 알림이 뜨자 메일을 열었다. 그리고 A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장 방금 보낸 메일 취소해!"



인사제도의 개혁에 대해서 사람들이 기억하는 단순한 사실 몇 가지는 반바지를 입을 수 있다는 것과 상호 간의 호칭이 바뀐다는 것 정도인 듯하다. 누군가도 나에게 "그게 전부죠?"라고 질문을 하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하는 말이다. 장장 한 시간 동안 인사제도 개혁에 대한 설명회를 들었는데 사실 나도 기억에 남는 것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 정말 그게 전부일까?


실제로 B는 잘못된 판단을 했었는데도 불구하고 A는 B에게 "당신이 잘못 판단하고 있습니다."라고 말을 할 수가 없다.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도 '선배'는 일단 대접받아야 하는 사람이다. 이것은 상호 간의 호칭이 바뀐다고 해서 쉽게 역전될 문제는 아닌 듯하다. 누가 정해주지 않아도 서열은 정해지고 군대를 다녀오지 않는 여사원들도 어느샌가 이런 군대문화에 익숙해져 있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스스로가 기득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대다수의 사람들, 그중에 속한 B도 자신보다 후배에게는 굉장히 권위적이다. 메일의 내용, 기술적이고 핵심적인 문제에 대한 토론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이 보낸 메일에 반대되는 의견을 제시했다는 이유로 당장 메일을 취소하라고 소리를 지를 수 있다. 당연히 자기보다 선배가 보낸 메일이었다면 그렇게 못했을 것이다.




혁신을 이루어내는 기업의 문화를 그대로 가져오면 우리 회사도 혁신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일정 부분 맞을 수 있지만, 냉정하게 따져보아 정말 실현 가능할지 계산해볼 필요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제도의 개혁이 곧 문화의 개혁으로 이어진다는 것 또한 과연 가능할지 의문이다. 권위주의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도 사실은 그런 문화 속에서 살아왔기에 때로는 편하게 그 문화를 이용한다는 것을 B의 행동을 통해 알 수 있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문화를 바꾸기 위해서는 되도록 많은 사람이 자신의 권리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단순히 권위주의를 벗어나는 것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어떤 문화이든지 우리는 그 문화 속에서 불만을 가졌던 만큼 무엇인가 누리고 살았을 것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그리고 새로운 시대를 열고 변화를 바란다면, 내가 손해 볼 각오를 해야 한다. 


문득, 만화 원피스에서 정상결전의 마지막 즈음에 새 시대를 열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려던 흰수염이 생각난다. 그는 스스로를 구시대의 산물이라 여기며 새로운 시대에서 자신이 설 자리는 없다고 까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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