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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하인간 Aug 16. 2021

예술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무엇이어야만 하는가

칸트의 반성적 판단을 중점으로 추론

인류의 역사 속에서 지역과 시대를 불문한 채로 언제나 인간의 원동력이 되어 주었으며, 아직까지도 종교와 같은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문화가 있다. 바로 예술이다. 따라서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관해 고민해 보는 것은 인간에게 내재된 욕구나 생존 방식을 이해하려는 노력과 같다. 이 글은 정답이 존재할 수 없고 그저 주장만이 제기될 뿐인 그러한 질문에 대해, 미학적 이론의 관점에서 예술이 갖는 중요성과 인간이 그것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 중 일부를 드러내는 시도가 될 것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예술 작품이 지니는 공통적이고 본질적인 특성을 분석하려고 드는 시각은 거부된다. 왜냐하면 예술 작품의 보편적 특성을 서술하려 했던 그간의 미학적 이론들이 역설적으로 예술 전반의 잠재력을 한정된 틀 안에 가두거나, 혹은 반대로 그것의 힘을 무의미한 것으로 돌려놓는 등의 실수를 저지른 것은 물론이고, 논리적 타당성의 면에서도 완벽한 일관성을 얻지 못했던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바넷 뉴먼이 "새들에게 조류학이 필요하듯, 예술가들에게는 예술론이 필요하다"는 말로 비꼬았던 것처럼, 예술 이론이 예술가나 예술 작품, 그리고 포괄적으로는 미적 감각 자체와는 동떨어져 있기도 한 탓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질문의 중요성이 아직까지 유용한 것으로 남아 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인간의 내면을 간접적으로 추론하기 위한 통로가 되어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나이젤 워버튼의 말처럼 예술을 정의하는 이론이 "우리가 개별 작품을 어떻게 접근해야 최선인지를 우회적으로 알려주는 하나의 방편"이 되어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모리스 와이츠 또한 "이론의 역할은 무언가를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경구에 가까운 형태의 정의 형식을 빌려 우리가 다시 한번 그림의 조형적 요소에 주목하도록 진지하게 권고하는 이유를 정확히 알려주는 것"이라고 유사한 주장을 한 바 있다. 예술 이론은 예술 작품의 보편적 특성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예술을 감상할 때 어떠한 시각을 취하는 것이 좋은지를 설득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의 논지는 개별 예술 작품이 공유하는 보편적 특성을 탐색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미적 감각을 고찰한 뒤에 그곳에서 예술이 어떠한 방식으로 도출되는지를, 그리고 예술은 어떠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이 바람직한지를 정답이 아닌 주장의 형식을 빌려 파편적으로 다루는 것에 있다. 그에 따라 추론의 과정에서는 칸트의 [판단력 비판]과 그 안에서 설명되는 '반성적 판단'이 주축이 된다. 칸트의 비판 철학이야말로 인간의 감성적 직관 능력을 지성과 같은 위치로 격상시키면서 미학의 토대를 다졌고, 그 덕분에 미적 감각과 예술에 관한 학문적 토론의 장이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보다 본질적인 이해가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판단력비판]을 논하기 위해서는 그보다 먼저 [순수이성비판]을 개관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서양 지성사에서 인간의 인식 능력은 고전적으로 지성, 이성, 감성이 위계의 차이를 이루며 제시되어 왔다. 지성은 마부, 이성은 마차, 감성은 말로 비유되기도 했다. 마부가 원하는 목적지로 향하기 위해서는 마차에 올라 말을 제어해야 하는 것처럼, 인간 또한 이상적인 삶을 위해서는 지성으로 이성을 이용해 감성을 억제해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지성이 마부, 이성이 마차, 감성이 말인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칸트에 이르러서 변화를 맞이했다. 이성과 감성이 지성과 같은 위치로 격상되면서 하나의 삼위일체를 이룬 것이다.

     칸트의 비판 철학에서는 물자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이는 플라톤 철학에서의 이데아 이론과 유사한 개념으로, 인간이 직접 인식할 수 없는 초월적인 영역의 대상을 의미한다. 따라서 인간은 물자체가 촉발하는 내용을 받아들이기 위해 선험적인 직관의 형식을 필요로 한다. 그 형식을 이용해 직관을 가능하도록 만드는 능력이 바로 감성이다. 인간이 인식하는 세상은 물자체에서 촉발된 내용이 감성이 가지고 있는 선험적인 직관의 형식으로 구성되는 공간이다. 그런데 그 형식은 인간의 내면에 있는 자체적이고 독자적인 것이어서 물자체의 형태를 있는 그대로 전달한다는 확신을 가질 수는 없다. 결국 인간이 무언가를 특정한 형태로 바라본다는 것은, 그것이 그러한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그것을 그러한 형식으로 바라보기 때문인 것이 된다. 예를 들어서 사과가 빨간색인 이유도, 실제로도 사과가 빨간색으로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그것을 빨갛게 바라보기 때문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습득된 감성적 직관은 지성에 전달되어 범주에 따라 분류된 뒤에 이성에 의해 체계화된다. 이것이 인간이 무언가를 인식하고 알아가는 과정이다. 이때, 감성과 지성의 관계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그 둘의 사이에서는 상상력이 작용하면서 서로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상상력은 두 가지의 방식으로 작동한다. 감성이 얻은 직관을 지성에 전달하는 '종합'과 감성을 통해 받아들인 직관을 지성이 가공하는 '도식화'가 그것이다. 감성이 종합을 해야 지성이 도식화를 할 수 있고, 지성이 도식화를 해야 추상적인 개념도 직관될 가능성을 얻을 수 있다. 도식화는 감성을 통해 얻은 직관을 개념에 포섭시키기도 하지만, 추상적인 개념을 감성적 직관이 가능하도록 가공하기도 한다. 이 과정이 훈련되어 있거나 상상력이 뛰어난 사람은 어렵고 추상적인 내용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의 내용을 개념적으로 정리할 수도 있고, 반대로 그 추상적인 개념을 직관적으로 표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인간의 앎은 감성과 지성의 조화에서 시작된다. 서로가 서로의 조건인 동시에 결과다. 마치 인간의 하반신 구조와 같다. 인간이 걷기 위해서는 두 다리가 필요하지만, 그 두 다리를 연결하고 실질적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은 골반인 것처럼 말이다. 두 다리는 각각 지성과 감성이고, 골반은 상상력이며, 걷는 행위는 곧 무언가를 알아가는 과정이다. 지성의 다리가 먼저 내딛고 감성의 다리를 끌고 오는 것이 도식화, 감성의 다리가 먼저 내딛고 지성의 다리를 끌고 오는 것이 종합이다. 그렇게 종합과 도식화를 조화롭게 활용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또한 지성의 개념과 범주는 이성의 이념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이성은 골반을 바르게 잡아 주는 척추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인식은 감성이 선험적 직관의 형식으로 얻은 정보를 지성이 범주를 통해 분류하는, 즉 감성이 포착한 개별적이고 특수한 사례를 지성이 보편적인 개념으로 정의하거나 그곳에 포섭시키는 형태로 진행된다. 그러나 보편적인 개념에 포섭되는 것을 거부하는 대상이 나타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감성과 지성은 작동과 판단을 멈춰 버린다. 그리고 그것을 포섭시킬 수 있을 만한 개념을 새롭게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칸트는 이를 '반성적 판단'이라고 표현했다. 이 시점이 바로 [판단력비판]으로 들어서는 곳이다.

     칸트가 말하는 판단력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첫 번째는 규정적 판단이다. 대부분의 판단이 이에 해당된다. 이미 존재하는 보편적 개념에 개별 사례를 포섭시키는 능력이다. 사법부의 판단과 유사하다. 사법부는 이미 존재하는 법에 근거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사건을 처리한다. 주어지는 사건은 매번 다르지만 사법부는 그때마다 어떤 법률을 적용해야 할지를 알고 있다. 개별 사례가 사건이라면, 보편적 개념은 법률이다. 두 번째는 반성적 판단이다. 이는 가지고 있는 보편적 개념으로 정의할 수 없는 특수한 개별적 사례를 마주했을 때 필요하다. 입법부의 판단과 유사하다. 사법부는 기존부터 존재하고 있던 법률에 근거해서 사건을 처리할 테지만, 그것들로는 본질적인 면에 접근할 수 없는 특이한 사건을 마주하기도 한다. 그러면 입법부가 나서서 그러한 사건에도 적용할 수 있는 새로운 법률을 만들어내야 한다. 이처럼 반성적 판단은 특수한 개별적 사례에 적용할 수 있는 새로운 보편적 개념을 생산하는 판단을 말한다. 이러한 반성적 판단은 다시 목적론적 판단과 심미적 판단으로 나뉘는데, 목적론적 판단은 자연이나 과학과 같은 분야에 속하는 사례의 본질적인 요소를 찾아내서 개념을 생산하는 판단이고, 심미적 판단은 아름다움이나 숭고와 같은 감정을 통해 새로운 이념을 사유하도록 유도하는 판단이다. 목적론적 판단에는 판단에 목적이 있다는 점에서, 심미적 판단에는 판단에 목적이 없다는 점에서 둘을 구분할 수 있다. 목적론적 판단을 통해 자연과 과학의 사례를 개념화하려는 노력은 그것을 파악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서 인간에게 어떠한 이점으로 작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심미적 판단을 통해서는 특정한 목적이나 의도를 기대할 수 없다. 그저 사례를 개념화하는 과정에서 생각지 못했던 선물을 받게 될 따름이다. 목적론적 판단은 목적지를 정해 놓고 떠나는 여행이며, 심미적 판단은 계획 없이 떠난 여행에서 마주하는 만족스러운 경험이다.

     규정적 판단과 반성적 판단은 공통적으로 그것을 행위하는 인간에게 쾌감을 준다. 무언가를 알고자 하는 욕구, 이해하고자 하는 욕구가 충족되기 때문이다. 규정적 판단은 산책을 하다가 책에서 보았던 꽃을 발견했을 때처럼,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서 쾌감을 준다. 반성적 판단은 산책할 때 보았던 꽃이 무엇이었는지 책을 읽으며 공부하다가 알게 되었을 때처럼, 그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다는 사실에서 쾌감을 준다. 따라서 반성적 판단은 감성이 품은 의문에 답하기 위한 지성의 노력과 같다. 칸트의 미학은 반성적 판단 중에서도 심미적 판단을 위주로 전개된다.

     심미적 판단에는 수많은 것들을 사유하도록 만드는 감성적 이념이 담겨 있다. 어느 대상이 겉으로는 아름다워 보이지만 무미건조하게 느껴진다면, 감성적 이념이 결여되어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심미적 판단을 위한 조건으로는 감성적 이념과 그것을 포함하는 반성적 판단이 필요하다. 심미적 판단 또한 반성적 판단의 일부이기 때문에 반성적 판단을 일으키지 않는 심미적 판단은 존재할 수 없고, 반성적 판단을 일으키지만 감성적 이념이 담겨 있지 않다면 그것은 심미적 판단이 아니라 목적론적 판단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예술은 이 조건을 충족하면서 심미적 판단을 일으키는 대상이다. 예술이 심미적 판단을 유발하는 매개체라는 시각을 전제로 놓고 본다면, 예술이란 무엇이고 또 무엇이어야만 하는지에 관해 추론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예술이 심미적 판단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감성적 이념을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는 관점에 주목한 것이다. 결국 예술은 형식화된 감성적 이념이다. 심미적 판단을 유발하는 예술 작품에는 그것을 창작한 이의 감성적 이념이 담겨 있기 때문에, 감상자가 그 작품을 감상하는 과정에서도 그것을 함께 소비하게 된다. 이는 이후에 등장한 로빈 조지 콜링우드의 이론과 유사한 내용을 공유한다. 콜링우드에게 예술은 '그것을 창작한 이가 느꼈던 모호하고 추상적인 감정을 구체화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예술 작품에는 그것을 창작한 이의 감정 상태가 표현되어 있으며, 감상자는 그것을 탐구하게 된다. 칸트와 콜링우드의 이론에 따르면 예술 작품에는 그것을 창작한 이가 느꼈던 특수한 형태의 감정이 내재되어 있어야 한다. 그 둘의 이론이 공유하는 유사점은 이뿐만이 아니다. 예술과 기술에 관해 콜링우드가 주장했던 개념은 칸트가 이야기한 천재 개념과 유사하다. 칸트는 예술가를 천재로 표현했다. 그들은 자신의 감성적 이념을 무의식적으로 창조하는 이들이다. '무의식적'이라는 말은, 그것을 말로는 설명할 수 없으며, 전달되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때문에 칸트의 입장에서는 뉴턴과 아인슈타인도 천재라 일컬어질 수 없다. 그들의 과학적 발견은 지극히 의식적인 행위이며 감성적 이념도 담겨 있지 않기 때문이다. 뉴턴과 아인슈타인의 과학 이론은 말로 설명할 수 있으며, 따라서 타인에게 전달되는 것도 가능하다. 콜링우드는 예술과 기술의 차이를 구분하며 이와 유사한 결론에 도달한다. 그가 설명하는 기술이라는 개념은 특수한 목적을 가지고 계획을 수립해서 그에 따라 사물을 제작하는 능력을 말한다. 반대로 예술은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뚜렷한 계획이 없이 제작된다. 물론 예술도 계획에 따라 제작될 수도 있지만, 그것은 대략적인 것일 뿐이다. 언급했던 것처럼 콜링우드에게 예술은 창작자의 모호한 감정을 구체화시키는 과정이기 때문에, 예술 작품을 창작하는 과정에서 예술가는 뚜렷한 계획을 수립할 수 없고, 심지어는 본인조차 그 작품이 어떠한 모습으로 완성될지를 알 수 없다. 피카소는 "내가 앞으로 무슨 색을 사용할지 모르는 것처럼 앞으로 내가 화폭을 어떻게 꾸며 나갈지도 모른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래서 콜링우드는 철저한 계획에 따라 창작되었으며 감성적 이념을 포함하고 있지 않은 작품을 예술이 아닌 기술로 규정한다. 그 탓에 관객에게 긴장감을 전달하기 위해 철저하게 짜여진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사이코>나 관객의 유흥을 위해 쓰여진 셰익스피어의 일부 희곡조차도 예술이 아닌 기술로 분류되어 버리기도 한다. 어찌 보면 예술은 특정한 형식으로 표현된 예술가의 감정이다. 그것을 감상하는 감상자는 그를 통해 예술가의 감정을 탐구하면서 자신이 경험해 본 적 없는 새로운 감정을 마주하거나, 이전에 이미 가지고 있었던 감정의 공감을 얻는다. 그러한 작용을 반복하면서 감수성을 기르고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해 볼 수도 있다.

     두 번째는 예술이 일으키는 심미적 판단 또한 반성적 판단의 일부라는 관점에 주목한 것이다. 따라서 예술은 독창적이어야 한다. 이는 반성적 판단이 보편적인 개념으로 정의할 수 없는 개별적이고 특수한 사례를 마주했을 때 작동하기 시작한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기존에 존재하던 보편적 개념으로 정의할 수 있는 대상은 반성적 판단을 일으키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기존의 것을 답습하는 데 그치는 독창성 없는 작품은 예술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 이는 클라이브 벨의 이론과 유사해 보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다르다. 벨은 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오직 형식이라고 주장한다. 심지어 예술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세속의 사고방식이나 문제들을 몰라도, 일상의 감정들을 느끼지 못해도 전혀 문제가 없다"고까지 이야기한다. 그에게 있어서 최악의 작품은 특정한 대상을 재현하는 데만 몰두하는 작품이다. 예술가는 오로지 대상을 형식적으로 표현해야 하고, 감상자 또한 그것을 개인적인 감정이나 경험과는 무관하게 형식에만 집중해서 감상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칸트의 반성적 판단은 독창성을 위해 형식에만 집중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벨의 주장은 칸트가 이야기한 감성적 이념을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다. 반성적 판단을 일으키는 심미적 판단을 위해서는 그것이 담고 있는 감성적 이념이나 그것을 표현하고 있는 형식 중에서 하나라도 기존의 것과 구별되면 된다. 담고 있는 감성적 이념이 기존에 있던 보편적 개념으로 정의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해도, 그것을 표현하고 있는 형식이 기존에 있던 보편적 개념으로는 정의할 수 없는 것이라면 반성적 판단이 작용할 여지를 확보할 수 있으며,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같은 감정을 다른 형식으로 전달하거나, 같은 형식으로 다른 감정을 전달하면 예술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물론 감정과 형식 모두 이전에 본 적 없는 독창적인 것이라면 심미적 판단의 쾌감은 증대할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장르의 존재를 정당화하는 명분으로도 작용한다. 예술 분야에서 작품들이 가지고 있는 뚜렷한 특징을 비슷한 것끼리 묶어서 분류한 것을 장르라 말한다. 그 탓에 동일한 장르를 가지고 있는 작품은 서로 동일해 보이는 특징을 공유하기도 한다. 예술 작품에서 주목해야만 하는 것이 오직 형식이라면 장르는 예술적이지 못하고 진부한 것들의 묶음으로 치부될 위험이 있다. 하지만 동일한 장르에 속하고 동일한 형식을 가지고 있는 작품들이라고 해도 서로 구분되는 특징이 있기 마련이다. 형식에만 집착해서 바라본다면 이러한 요소들이 보이지 않을 수 있다. 이는 공포 영화로 예를 들 수 있다. 이동진 영화 평론가는 공포 영화야말로 만든 이의 실력 차이가 가장 두드러지는 장르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아마도 같은 장르에 속한 작품들이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특징, 즉 클리셰가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장르인 탓에, 그것을 어떻게 변형시킬 것인가가 보다 중요한 관건으로 작용하는 탓일 테다. '귀신 들린 집'이라는 설정이 그러한 클리셰 중 하나다. 등장 인물이 귀신이나 악령이 들린 집에 들어서면서 겪는 공포스러운 이야기를 말한다. 대표적으로는 <이블데드>부터 <인시디어스>까지 수많은 영화가 이와 동일한 설정을 따라가고 있다. 이에 익숙해져서 반성적 판단이 불가능해진 관객들은 그러한 영화를 보면서 권태를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동일한 설정과 형식을 가지고 있음에도 기존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이야기를 전개하는 영화들은 여전히 심미적 판단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것이 <디 아더스>나 <케빈 인 더 우즈>와 같은 영화들이 비슷한 설정을 가진 영화들에 비해 보다 독창적이고 예술적이라는 평가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다. 이 두 영화는 여느 공포 영화들처럼 귀신이나 악령이 들린 집에 들어선 등장 인물들이 위험에 처하게 된다는 진부한 형식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관객은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이야기를 마주하게 된다. 장르적 관습을 비트는 판단이 쾌감을 주는 원인은, 반성적 판단이 불가능할 것이라 예상되었던 대상이 예상치 못하게 심미적 판단을 일으키면서 그 효과를 극대화시켰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보편성의 개념이다. 칸트는 심미적 판단의 특징을 네 가지로 분류했다. '개념 없는 보편성' 또한 그중 하나다. 심미적 판단은 기존에 가지고 있던 개념으로 포섭시킬 수 없는 대상이기 때문에 개념이 없다. 그리고 개념이 없기 때문에 모두에게 동일한 모습으로 도달된다. 개념이 있다면 각자의 관심사에 따라서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게 된다. 개념 없이 동일하게 표상된 직관은 그것을 수용하는 인간의 동일한 인식 능력으로 인해 동일한 형태로 받아들여진다. 글의 전반부에서 설명했던 지성, 이성, 감성, 상상령의 작동 방식은 모든 인간에게 동일한 형태로 적용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탓에 심미적 판단은 '개념 없는 보편성'이라는 특징을 갖게 된다. 이를 통해 예술 또한 감상자들에게 동일한 형태의 인상을 전달하게 된다는 사실을 유추해 볼 수 있다. 한스 페터 발머는 이러한 관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주장을 한다. "단언하건대 미적 경험은 세계와 함께 있다는 느낌에서, 세계와의 창조적 소통에서 시작된다"고 말한 것이다. 발머에 따르면 인간의 모든 실천적 행위는 미적 경험이 된다. 또한 인간의 감각은 외부를 마주하는 동안에 짧게 스쳐 지나가며 생산적이고 초월적인 동력을 생산한다. 그 안에는 직감적으로 파악한 것을 표현하고 타인에게 전달하는 능력이 담겨 있어서 "예술은 인간 상호 간의 소통, 연대, 정의 등을 촉진"시킨다고 말을 덧붙인다. 정리해 보면,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행위에는 타인과의 연대를 위한 내적인 힘이 표출되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칸트와 벌머의 이론을 종합하자면, 인간은 자신이 느낀 감각을 타인에게 전달하기 위해 동일한 감성적 이념을 담아 예술을 창작하며, 그것을 감상하는 이들은 그 작품을 매개로 그들이 느꼈던 것과 같은 감정을 습득한다. 인간의 예술 활동은 결국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서로가 동화되기 위한 인류애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언급된 세 가지의 관점은 당연히 비판의 여지를 가지고 있다. 첫 번째의 관점은 언급했던 것처럼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영화나 셰익스피어의 희곡조차 예술이 아닌 것으로 치부하게 될 위험을 갖는다. 작품에 감정이 담겨 있지 않다고 해서 그것을 예술이 아니라 단언할 수는 없는 일이다. 두 번째의 관점은 셋 중에서 가장 견고한 이론이기는 하지만, 기준이나 정도에 관해서는 역시나 비판의 여지가 있다. 독창성의 기준과 정도가 어느 수준부터 인정될 수 있는지를 결정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완벽하게 동일한 예술 작품이라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어떠한 그림을 똑같이 따라 그린 위작이라고 할지라도, 미세한 차이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다. 그 미세한 차이도 독창성으로 인정 받을 수 있어야 하는가? 아니라고 한다면, 독창성의 기준을 어느 정도에 세울 것인가? 이 문제에 관해서는 의견의 차이를 좁히기 어려울 것이다. 오마주와 패러디, 표절의 차이조차도 주관적인 요소로 결정되는 것이 사실이다. 세 번째의 관점은 예술의 다채로운 면을 묵살시킨다. 감상자는 예술 작품을 감상하면서 그것을 창작한 예술가의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바라볼 자유가 있으며, 그것을 받아들일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에 관해서도 자발적으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타당하다. 때문에 이러한 관점은 언뜻 전체주의적인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다만, 글을 시작하며 밝혀 두었던 것처럼 이러한 관점들은 예술 전반이 지니는 보편적이고 공통적인 특징을 나열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개별적인 예술 작품을 감상할 때 경우에 따라서는 유용한 것이 될 수 있는 파편적인 시각을 전달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 글은 오직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인간이 그것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를 부분적으로나마 추론해 보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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