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습실 피아노 위 낡은 악보

왼손은 기억하지 않는다

연습실은

오래된 건물의

지하에 있었다.


습기와

먼지가 섞인

공기 속에서,


피아노의 나무 냄새가

은근하게 났다.


나는 연습을 마치고

짐을 챙기다,


피아노 위에 놓인

악보 한 장을 발견했다.


표지가

바래 있었고,


페이지 가장자리가

손에 익은 듯

부드럽게 닳아 있었다.


맨 윗줄에는

이름 대신

연필로 적힌

메모가 있었다.


‘왼손은 기억하지 않는다.’


그 문장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누가 쓴 걸까.


이 연습실엔

수십 명의 학생이

드나들지만,


이런 말을 남길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나는

악보를 펼쳐보았다.


여러 번 지워지고,

다시 적힌 음표들.


어딘가 불안한

손끝의 흔적들.


한쪽 모서리엔

커피 얼룩이,


다른 쪽엔

종이테이프로 붙인

조각 악절이 있었다.


그 위로

먼지가 살짝

내려앉아 있었다.


피아노

뚜껑을 닫으려다,


그 악보를

잠시 펼쳐둔 채


왼손으로

건반을 눌러봤다.


C코드

약간의 울림


그리고 아주 약한,

종이의 떨림 소리.


그건 마치

누군가의 연습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처럼

들렸다.


잠시 후,

불을 끄고 나가면서


나는 악보를

제자리에 두었다.


언젠가

다시 올 누군가가


그 음을 이어서

연주하겠지.


그게

음악의 방식이니까.


누군가

멈춘 자리에서


또 다른 누군가가

시작하는 것.


연습실 피아노 위 낡은 악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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