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취생의 '오늘의 집' 중단 선언

택배 휴식기 좀 가질게요. 이만하면 충분합니다.

by 오월

"자취 한 지 오늘로 딱 한 달이야."

"한창 택배 받고 있을 때겠구먼?"

"응. 근데 좀 지쳐서 쉬는 중이야."

"ㅋㅋㅋ 뭔지 잘 알지. 쉬엄쉬엄해."


자취 만렙인 친구들은 나의 현 상황을 어쩜 그리 잘 꿰뚫어 보는지, 하나같이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그중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는 단연 '오늘의 집'. 대한민국 자취생은 모두 같은 패턴을 밟고 있단 말인가.


'예쁜 템들이 모여사는' 오늘의 집은 물욕이 적은 내게도 소비의 맛을 제대로 알려줬다. 평소 온라인 쇼핑을 즐겨하지 않기 때문에 본가에 있을 땐 내 이름으로 택배가 한 번에 몰려오는 일은 없었다. 꼭 필요한 건 오프라인으로 사는 편이라, 생일 주간이나 명절 주간을 제외하고는 택배 상자가 쌓일 일이 없다.


하지만, 새로 이사 온 집 앞에는 상자가 줄줄이 놓여있다. 마치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을 보따리채 두고 가신 것 마냥. 그분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오늘의 집'에서 오신다. 나도 내가 이럴 줄 몰랐다.

2페이지가 넘어가는 구매 목록을 보고 있자니, 조금 당황스럽긴 하지만 '이거... 좀 재밌는데?!' 내가 고심해서 취향껏 고른 제품이 며칠 만에 집 앞에 떡 하니 와있을 때의 기쁨. 설레는 마음으로 언박싱하는 재미. 사진으로만 보던 제품의 실물을 마주하는 즐거움 (다행히도 대부분 성공). 원하는 위치에 이리저리 배치해 볼 때, 그리고 매일 오며 가며 집안에 자리 잡은 물건을 보는 만족감. 모든 과정이 즐거웠다. 나의 선택이 곧 나의 행복이 되었다. 말 그대로 오롯이 나로 채워가는 공간.

그런데 웬 걸. 2주 차쯤 되니 조금씩 지쳐갔다. 한동안 줄자와 한 몸이 되어 주요 가구(침대, 소파, 식탁, 의자, 수납장, 좌식 테이블)를 채우고 나면 어느 정도 끝날 줄 알았는데. 시작에 불과했다. 주방용품, 욕실용품, 청소용품은 왜 이렇게 챙길 것이 많은지. 특히나 러그, 침구, 담요, 쿠션, 티슈 케이스, 디퓨저, 그릇, 찻잔, 액자처럼 디테일한 디자인이 중요한 제품을 고를 때면, 검색 능력을 최대로 끌어올려 손품을 팔아야 했다. 조화를 몇 송이 구매할 건지까지 디테일하게 결정해야 한다. 성공적인 구매를 위해 후기도 꼼꼼히 다 챙겨봤다. 끝이 보일 듯 말 듯. 그럴 때마다 오늘의 집은 "이건 챙겼어?!" "잠깐! 이런 디자인도 있지요~ 이런 꿀템도 놓치지 마~" 매일 새로운 걸 보여주었다. 그래서 인덕션 클리너까지 구매한 사람 나야 나.


감사하게도 독립을 축하한다며 지인들이 선물을 보내오기도 했지만, 기본 옵션을 제외하곤 아무것도 없는 0에서 시작하는 첫 자취인만큼 살 게 많았다. '한꺼번에 채우려고 하진 마.' '자취는 심플한 게 최고야. 많이 사지 마.' 친구들의 조언을 새겨들었음에도 필요한 건 구매해야 했다.


구매 목록도 품목별로 디테일하게 잡았건만! 미니멀 라이프를 지향했건만! 장식용 트레이를 사이즈별로 사려는 건 뭐람? 화분과 조화는 왜 자꾸 들이려는 건지?포인트는 왜 이렇게 쌓이나? 소비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가 바로 '오늘의 집' 효과인가.


게 중 다행인 것은 충동 소비와는 거리가 먼 편이라, 장바구니에 잔뜩 담아뒀다가 막판에 정신 차리고 많이 걷어냈다. 그러는 과정에서 어느 날은 반나절 넘게 오늘의 집에 갇혀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오늘의 집 같은 어플이 있어서 참 좋다'라고 할 땐 언제고, 소비의 노예가 된 기분이랄까. 매일같이 손으로 찾고, 눈으로 보고, 머리로 계산하고, 미적 감각을 총동원해서 고르고.


온갖 취향을 한 데 모아놓은 '오늘의 집'은 실제로 유용한 인테리어 레퍼런스가 되어주었다. 하지만 적당히 멈출 줄 알아야 했다.


'오늘의 집'은 소비를 강요하지 않는다. 다양한 집과 그 집에 거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나면서 내 취향을 발견하기도 하고, 새로운 트렌드를 접하기도 하고, 전에 없던 로망도 생겨난다. 그렇게 소비자들의 자발적 소비를 이끌어내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여들 수밖에 없는 장이 되었다.


그만큼 슬기로운 소비 생활이 필요하다. 각자의 예산 범위 내에서 구매 품목과 개수까지 확실히 정하고 출발하는 것이 좋겠다. 제품 탐색 기간, 구매 기간을 정해놓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의 집'이라는 드넓은 바다에서 몇 날 며칠 끝도 없이 허우적거리게 될지도.


친구들에겐 지쳐서 잠시 쉬어가겠다고 했지만, 집안을 둘러보니 이만하면 충분히 다 채운 것 같다. "안 되겠어. 오늘의 집! 오늘부로 중단!" 어플도 자주 보지 않게끔 폴더에 넣어두었다. 첫 한 달 동안 둘도 없이 가까웠지만, 자취 세 달 차에 접어드는 지금. '오늘의 집' 한 달 이상 무지출 성공! (주 1회 식료품 새벽 배송을 제외한 그 어떤 택배도 오지 않고 있다.)


계절이 바뀌거나, 다음 집으로 이사하게 될 때. 다시 너를 찾게 되겠지! 그때까지 잠시만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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