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밭에서 와인 피크닉

# 나파밸리 와이너리 여행

by 오월

샌프란시스코에서 맞는 셋째 날, 오늘은 아무런 계획이 없었다. 계획 없인 불안한 J형의 인간이 무계획에도 여유로울 수 있었던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 바로 현지에 사는 지인, 그것도 가족!


이럴 우물 안 개구리처럼 나의 계획을 고집할 필요도, 좁은 계획의 틀에 갇힐 필요도 없다. 때론 타인의 낯선 계획 속으로 들어가 함께 해보는 것도 여행의 좋은 방법이다. 생각지도 못한, 완전히 새로운 세상으로 나를 데려가 줄 테니까.


그렇게 이날, 아주 뜻밖의
<나파밸리 와이너리>로 향하게 됐다.


대학생이었던 이때는 나파밸리가 어느 지역인지, 무엇으로 유명한지, 사전 정보가 전혀 없었다. 와이너리에 가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었다. 모르는 만큼 호기심에 가득 찬 여정이 그저 설렜다. 버클리에서 차로 한 시간 넘게 달리니 포도밭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포도 로드'다. 나홀로 뚜벅이 여행자였다면 오기 쉽지 않았을 곳인데, 사촌오빠 덕분에 미국에서 뜻밖의 포도밭 여행을 하게 되다니! 눈에 들어오는 모든 풍경이 나를 들뜨게 했다.

나파밸리(Napa Valley)

샌프란시스코에서 북동쪽으로 1시간을 굽이굽이 달리면 목가적인 분위기의 포도밭에 이른다. 나파밸리는 캘리포니아 와인의 심장으로 불린다. 미국 와인 투어리즘의 기본이 되는 곳으로, 캘리포니아 와인 생산지답게 사이즈도 남다르다. 드넓은 포도밭 길을 따라 와이너리가 끝없이 이어진다. 대규모 와이너리만 300여 곳이 있다. 와이너리마다 분위기도 천차만별이다. 저마다의 특색이 있어 골라서 찾아가는 재미도 있고, 첫 방문자라면 취향을 찾아가는 재미도 쏠쏠하다. 우리는 그중 3곳의 와이너리를 찾아가 본다.

'미국 와인'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프랑스 와인만이 최고라는 인식을 깬 일명 <파리의 심판> 사건. 1976년 5월, 프랑스 파리에서 와인 품평회가 열렸다. 11인의 와인 평론가들이 블라인드 테이스팅으로 최고의 와인을 가리는데, 미국 캘리포니아 나파밸리의 레드&화이트 와인 모두 프랑스 와인을 제치고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평론가 11명 중 9명이 프랑스인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와인 종주국인 프랑스 와인을 제치고 프랑스인들의 입맛까지 사로잡으며 나파밸리 와인이 1위를 휩쓴 사건. 이후로, 미국 와인 산업이 나파밸리를 중심으로 발전했다고 한다.

#1. 오퍼스 원 (Opus One Winery)

미국 와인과 프랑스 와인의 만남으로 유명한 곳. 미국 와인의 대가 ‘로버트 몬다비’와 프랑스 보르도의 1등급 와이너리 ‘샤토 무통 로쉴드’가 합작한 와이너리다. 두 사람은 만난 지 한 시간 만에 같은 꿈을 담아 하나의 와인을 만들기로 뜻을 모았다고. 그래서 건물 위쪽에는 프랑스 국기와 미국 국기가 같이 걸려있다.


와이너리로 향하는 입구부터 웅장하다. 올리브 나무 사이로 뻗은 길은 마치 광고의 한 장면 속으로 들어가는 듯했다. 포도밭과 와이너리 그 이상의 분위기에 압도되었다. 건물 형태가 다소 특이한데 상공에서 보면 와인잔 모양이라고 한다. 오퍼스 원이라는 이름의 뜻처럼, 어디선가 작품번호 1번(Op.1)의 클래식 선율이 흘러나와 이곳을 감싸 안을 것만 같았다.

음악 용어로 ‘작품번호’란 뜻의 오퍼스(Opus) + ‘첫 번째’라는 원(One)의 합성어. 즉 ‘첫 번째 작품’이란 뜻으로 미국과 프랑스 양국의 화합을 담은 작품이다. 프랑스의 전통적인 양조법과 미국의 현대적인 양조 기술이 만나 새로운 와인의 역사를 만들어냈다. 오퍼스 원은 캘리포니아 와인을 세계적으로 알리는 역할을 했고, 컬트 와인(소량 생산되는 고품질 와인)의 대명사로도 유명하다.

예약제라 들어가면 직원이 안내해준다. 지하에 위치한 거대한 와인 저장고, 양조 시설, 실험실을 둘러보며 와인이 제조되는 과정도 들을 수 있다. 테이스팅룸에서는 한 잔에 20불~100불로 와인 시음도 가능하다. 와인에 와자도 모르면서 멋모르고 마셔 본 와인의 맛은 강렬했다.

포도밭도 가까이서 볼 수 있다. 나파밸리는 지중해성 기후로 낮에는 충분한 일조량과 밤에는 선선한 기후로 포도가 잘 자랄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큼직한 포도 알알이 실하게 열려있다. 파란 하늘과 뜨거운 태양 아래 펼쳐진 포도밭을 보고 있자니, 무념무상 무언가로부터 해방되는 기분과 동시에 왠지 모르게 마음이 풍요로워진다.

#2. 로버트 몬다비 (Robert Mondavi Winery)

두 번째로 간 곳은 오퍼스 원 바로 건너편에 있는 '로버트 몬다비 와이너리'.

캘리포니아 와인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미국 와인의 상징이기도 하다. 황무지 같은 나파밸리를 세계적인 와인 산지로 바꿔놓으며 캘리포니아 와인의 수준을 끌어올린 인물이다. 단순히 와인을 제조하는 것뿐만 아니라 여름 와이너리 콘서트, 포토밭 투어, 테이스팅 프로그램 등을 만들며 와이너리를 대중화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래서인지 이날도 잔디밭에서 문화 행사를 준비하는 듯 보였다. 기본적으로 투어는 비슷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예약하고 가서 와인 제조 과정에 대한 설명도 들을 수 있었다.

와인 1병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포도는 2.5kg.
포도밭에서 포도를 수확해 여러 과정을 거친 후, 판매되기까지는 3년이 걸린다.
기본 발효 과정을 거친 후에 새 오크통에 넣고 1년간 1차 숙성을 한다. (2만 리터가 들어가는 프랑스산 거대한 오크통이 3000만 원이라고.)
그러고 나서 블렌딩 해서 1년 더 숙성. 또 병에 넣고 1년 더 숙성해서 3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와인을 두고 '무르익은 포도의 맛'이라고 표현하는 게 괜한 말이 아니다. 오크통 안에서 포도의 맛과 향이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어야만 우리에게 올 수 있는 것이다.

#3. 사뚜이 와이너리 (V.Sattui Winery)

앞서 본 두 와이너리는 모던한 클래식 같았다면 '사뚜이 와이너리'는 친근한 컨츄리 팝이 흘러나올 것만 같았다. 1885년 설립된 이후, 미국 금주령 기간인 1920년부터 1976년까지 오랫동안 폐쇄되었다가 이후에 다시 개장된 와이너리다. 유럽의 작은 시골 마을에 온 것처럼 푸근하다. 좀 더 아기자기하고 캐주얼한 분위기. 예약 없이도 방문 가능하다. 무엇보다 포도밭 옆으로 넓은 잔디밭에서 자유롭게 피크닉을 즐길 수 있는 것이 이곳의 가장 큰 장점이다.

잔디밭에 테이블과 벤치를 잘 배치해두었다. 특히 와인을 숙성시키는 오크통을 반으로 잘라 만든 테이블이 인상적이었다. 와이너리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운치 있는 피크닉 소품이었다.

실내마켓이나 푸드트럭에서 음식과 와인, 안주를 구입해서 야외에서 마음껏 피크닉을 즐길 수 있다. 푸드트럭에서는 화덕피자, BBQ, 파스타, 샌드위치 등을 판매하고 있었다. 우리도 골고루 시켜서 잔디 정원에서 피크닉을 즐겨본다. 여행자들 뿐만 아니라, 현지인들도 주말 나들이로 오기 좋은 와이너리다.

이곳의 와인은 시중에 판매하지 않고, 이곳에서만 살 수 있다고 한다. 기프트샵에서는 와인뿐만 아니라 각종 치즈와 햄, 스프레드. 와인잔과 치즈 보드까지. 와인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다양하게 판매하고 있었다. 구경만으로도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샌프란시스코에 왔는데 나파밸리를 안 갔더라면 얼마나 아쉬웠을지. 인생 계획에 없던 포도밭 피크닉은 근사하고 멋진 경험으로 남아있다.


"와인 잘 모르는데 굳이 갈 필요가 있을까?"

"와이너리에 가면 와인 마시고 오는 게 끝 아냐?"

아니다. 와인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겠지만, 나처럼 와인을 잘 모르고 가도 와이너리를 즐기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다. 와인은 거들뿐 이외에도 즐길 거리들이 가득하다.


한적한 포도밭을 배경으로 달리는 것만으로도. 포도밭 옆에서 피크닉을 즐기는 것만으로도. 신선한 와인 한잔을 시음해보는 것만으로도.

와인과 내적 친밀감이 생긴다. 평생 가장 많은 포도를 보면서 종인 포도에 취한 날이었다.


지금도 와인샵에서 나파밸리산 와인을 보면 괜스레 반갑고, 한적했던 그날 오후의 풍경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샌프란시스코에 간다면 도심 여행도 좋지만, 와이너리 여행도 한 번쯤 해볼 만하다.

마음 같아선 나파밸리 근처에 숙소를 잡고 하루 이틀 머물며 다른 와이너리도 둘러보고 싶었지만, 첫 술에 배부르랴.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반나절의 나파밸리 나들이를 마치고, 집으로 향한다.


금문교를 지나오는 길에 '배터리 스펜서(Battery Spencer)'에도 들러본다. 금문교를 구경할 수 있는 뷰 포인트가 여러 곳이 있는데, 그중에서 금문교를 가장 가까이 볼 수 있는 전망대이다. 안개가 자욱한 게 샌프란시스코다운 풍경이다.

마침내 집으로 돌아와서 먹은 건 짜파구리와 꽁치 김치찌개에 따순 밥 한 숟갈. 미국 여행 중에 가장 반가운 맛이었다. 주렁주렁 당도 높은 포도 한 송이까지 뚝딱 해치웠다.


포도로 시작해서 포도로 마무리하는

달달했던 8월 어느 여름날의 기록.





번외 :)

샌프란시스코에서 남은 날들도 그렇다 할 계획 없이, 발길 닿는대로 여유 있는 시간을 보냈다.

UC 버클리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
'알라모 스퀘어(Alamo Square)' & '페인티드 레이디스(The Painted Ladies)'
'미션 돌로레스 파크 (Mission Dolores Park)'
버클리에서 브런치 타임
블루보틀 1호점이 있는 '페리 빌딩 (Ferry Building)'
전망 좋은 두 개의 봉우리 '트윈 픽스 (Twin Pea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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