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감은 처음이었다. 가을의 불청객이라는 독감은 감기랑 확실히 달랐다. 전날은 적당히 기운 없는 정도였을 뿐. 평생의 감기 전문가인 나조차도 전혀 다음날의 사태를 예감하지 못했다. 눈을 떴는데 몸이 이상했다. 밤새 삽자루로 맞은 듯이 아팠다.
말로만 듣던 근육통이 이런 거구나 대번에 알 수가 있었다. 마치 무덤 봉분만큼의 흙더미와 내가 한 몸인 것 같은 일체감이 불쾌했다. 한 발작 걸을 때마다 살들이 죽어라 비명을 질렀다. 38도가 넘는 고열, 들숨에 몸이 떨리고 날숨에 기가 휙휙 빠져나갔다.
그날이 토요일이라는 것이 나를 더 절망의 무덤 속으로 다시 들어가게 했다. 당연히 주말에 진료하는 병원이 어딨어? 라는 평소의 막연한 생각이 병을 또 키웠다. 참 어리석다. 게다가 그렇게 주말 내내 앓고 월요일에 진찰을 받았지만 동네 내과에서 큰 병원에서 검사받기를 권했다.
그 다음날, 의료원에 갔다. 대기 중에 동네 내과에서 써준 소견서라는 것을 꺼내 보았다. 내가 읽을 수 있는 건 의사의 소견 말고 내가 진술한 말 뿐이었다. 하지만 “목 안 아프고요, 기침, 가래는 없어요.” 이렇게 했던 내 말이 예상과는 다르게 적혀있었다.
“인후통 -, 기침 -, 가래 -”
이것이 내 말과 백 프로 동일한 표현인가? 자동 암호화된 것인가? 의사들끼리는 작대기가 NO라는 뜻으로 통하는 소견서 공통 번역 표기 양식인지? 나라면 X라고 썼을 텐데 굳이 작대기를 왜 썼을까? 끙끙 앓는 중에 의료 비전문가 상식선에서 이러저러한 생각이 떠올랐다.
“아이고, 목도 아프시고 기침, 가래도 있으시군요?”
에헤. 이럴 수가. 소견서를 본 의사는 역시 완전히 반대로 해석하였다. 표기가 문제인가? 해석의 문제인가? 뭐든 간에 이 의사가 소리 내서 말로 확인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내가 바로 고쳐서 알려주지 않았다면 이 의사는 올바른 처방을 못했을 수도 있었다. 어쨌거나 검사 결과 독감판정을 받고 타미플루 처방약을 먹고 수요일부터 차도가 있었으니 4일을 쌩으로 앓았다.
누워서 창 너머 지고 뜨는 해만 바라보았다. 햇살이 나를 더 몽롱하게 했다. 저 햇살이 입자인 동시에 파동이라는데...... 그리고 세상 만물은 모두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는데, 그래서 어떤 죽음도 원자들의 흩어짐일 뿐. 그 원자는 영원하니까 나도 영원한가? 그 어려운 미시세계를 하마터면 이해할 것만 같은 착각 속에 잠들고 아파서 깨고를 반복했다.
아프면 생각이 많아진다. 나이 50이 넘고부터는 한번 아플 때마다 뭔가 이상하게 전과 정서적으로 다르다. 욕망의 반감기가 이미 작동된 것 같다. 나와는 약간 떨어진 어떤 곳에서 나의 일상을 내가 쳐다보는 느낌이 있다. 보는 자의 관조적 자세랄까? 그러다 보니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삶이 리허설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 이건 본게임이 진짜 아닐지 모르니 조금 힘을 빼도 좋지 않을까.
물만 먹었다. 물만 맛이 괜찮았다, 모든 게 썩은 맛이었다. 죽도, 김치도 그랬다. 하루에 1킬로그램씩 해서 3킬로그램이 빠졌다. 병원 가는 날, 옷을 갈아입는데 나는 놀라버렸다. 독감증상에 환상은 없다. 그런데 미스코리아가 내 얼굴을 하고 서있다니......! 쏘~옥 들어간 허리와 배. 훔치고 싶던 그러나 가질 수 없던, 분명 그 라인이었다.
K-독감의 남다른 위력. 여차하면 체중 앞자리가 바뀔뻔할 초유의 사태. 너무 짧은 순간이라 찬란했다. 약을 먹고 입맛이 돌아와서는 3일 만에 다시 풍만한 허리와 잘록한 가슴 고대로 원상 복귀된 점은 조금 아쉽기는 하다. 환상 맞다.
회사 다닐 때는 회사에서 매년 독감접종을 신청받아서 사내에서 주사를 맞았었다. 지루한 직장에서 업무 중에 주사 맞는 일이 그나마 잠시 일도 한 템포 쉬고 숨도 돌리는 시간이라는 것만으로도 안 맞을 이유가 없었다. 팔뚝에 바늘구멍 난 김에 차 한잔도 하고 했던 기억이 있다.
6년 전쯤 퇴사를 하고 재택근무를 하면서 사회생활을 안 하니까 아무래도 사회와 연결됨으로써 얻는 자동 습득 정보가 어느 정도 차단되는 면이 있다. 독감접종이란 게 내 일상에서 멀어져 남이야기처럼 여기다가 이번에 아주 뼈아픈 교훈을 얻었다. 내친김에 접종을 더 알아보았고 폐렴접종과 대상포진 접종까지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만화책에서 봤는지 양호선생님에게 들은 건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어릴 적의 어스름한 기억이 있어서 힘껏 목을 젖히고 약을 삼킬 때마다 혼자 상상하는 게 있다. 그 약이 알갱이들로 녹으면서 강력한 군대로 변신하여 내 몸의 병균들과 전투하는 장면이다. ‘잘 싸워주기 바란다. 어서 승전보를 보내다오.’
그래서인지 나는 진료 마지막에 꼭 “선생님, 센 약으로 해주세요”라고 말하는 버릇이 있다. 그 한마디에 전투력 만렙인 용병들로 보내달라는 내 상상이 들어있다는 걸 의사는 알 리가 없다. 소견서에 작대기를 쓸 게 아니라 ‘증상 있음’, ‘증상 없음’이라고나 썼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