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춘 것들에 대하여, 늦은 깨달음

by 황부장


로봇 청소기가 고장 났다. 로봇청소기는 아침이면 마치 자기 할 일 알아서 한다는 듯, 한결같은 나의 하루 첫 루틴이였다. 그날은 평소의 거침없던 출발이 아니라 충전기 언저리에서 약간의 미동만 반복할 뿐이었다. 이젠 아침을 함께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거 같았다.


다음날 화장실 아침, 언제나 나를 따듯하게 맞이해 주는 비데에게서 낯선 싸늘함이 느껴졌다. 램프는 켜져 있지만 버튼이 작동을 안 한다. 비데의 그 차가운 침묵을 깨보고자 코드를 뺐다 꼈다 해보았다. 똑같았다. 온열기능과 분수기능 둘 다 상실한 플라스틱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바로 다음 날, 물걸레 청소기마저 고장이 났다. "얘는 또 왜 이러지?" 혼잣말이 절로 나왔다. 그래, 고장 난 로봇청소기 몫까지 그간 고생했다. 그래봤자 겨우 이틀이구만 고걸 못 버티고 파업을 하다니. 어쩔 수 없이 내가 손수 쭈그려 엎드려 무릎걸레질을 해야 했다. 엄마세대 이후로 모두 멸종해버린 무릎사피엔스가 내 집에서 다시 탄생하고야 말았다. 역사적인 역진화의 순간이라 아니할 수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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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그다음 날, 어허......! 이번엔 고양이 정수기였다. 흐르지 않는 물 앞에 고양이가 멍하니 앉아서 날 쳐다보았다. 애기 때 우리 집에 와서 욕조에 들어앉아 수도꼭지를 바라보는 것을 보고 우리 고양이가 흐르는 물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고 그 후로 우리 집엔 물소리가 ASMR이 되었다.


추억여행은 그만. 사망한 정수기를 옆으로 치우고 그 자리에 얕은 양재기를 놓고 물을 부어주었다. 청소기의 부릉부릉 모타소리, 쿵쿵대며 가구에 부딪히는 소리에 이어 물소리마저 끊기니 집안은 순식간에 정적이다. 잃어버린 소음들로 가득한 집안은 이상하게도 안정감까지 잃어버린 기분이다.


사망, 정지, 멈춤, 그만, 여기까지. 그렇게 하루에 꼭 하나씩 내 소중한 물건들이 차례로 멈춰 섰다. 작동하지 않는 것들이 가구처럼 놓여 있는 풍경이 약간은 기이해서였을까. 그 불길한 연속성이 설명이 아니라 해석을 요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다음은 나의 소중한 무엇일까.


물론 알고 있다. 전자제품은 언젠가 수명을 다한다. 동시에 고장, 날 수도 있다. 조금 귀찮아졌을 뿐 아무것도 아닌데 마음은 그 너머를 읽으려 한다. 사실은 그저 우연이 기계의 수명이 다한 것뿐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심리는 논리를 비껴간다. 인간은 사건보다 분위기에 더 쉽게 흔들린다. 더한 무언가 잘못되고 있음을 직감해야 하는 건 아닐까.


소음정도야 어쨌든 되찾을 수 있지만 그럴 수 없는 뭔가가 고장 나면 어쩌지? 그 어긋난 일상의 리듬을 찾을 생각만 하지 말고 멈춰서 뭔가를 좀 보라고 나더러 신호를 보내는 것일까? 고장 난 기계들을 차례로 내려다보며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내가 놓친 누적된 미세한 삐걱거림이 무엇인지 멈춘 것들이 나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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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음 날이었다. 아. 이번엔 고양이가 아프다. 내가 콧물이라면 병원까지 안 갔을 테지만, 또 앞의 고장 난 기계들이야 며칠째 방치하고도 사소한 불편함으로 잘 지냈지만 당연히 우리 고양이는 불편함의 문제와는 차원이 다르지 않나. 그럴 순 없었다.


콧물이 단순 염증이라 했을 때만 해도 괜찮았다. 약 먹고 주사 맞고 바로 멈춘 것은 아니지만 괜찮았다. 콧속 혹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도 괜찮았다. 염증덩어리일 것이라 했으니까. 그런데, 그 혹이 자란다는 걸 알게 됐을 때, 그땐 괜찮지 않았다. 아, 나에게 가까워오고 있는 멈춤들의 신호들. 아, 그러려고 그랬나 싶은 생각이 들면서 불길했다.


결국 종양 판정을 받고야 말았다. 기계들의 침묵은 거대한 두려움과 괴로움의 예고편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 이제 내 세상의 모든 소음이 멎을지도 모른다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진짜 공포가 밀려왔다. 내가 정말로 잃고 싶지 않았던 소리는 바로 이 작은 생명의 숨소리였음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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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가 통증을 갖고 지낸다는 걸 전혀 생각못했다. 그저 노묘라서 활기가 없는 거겠지. 영양제 골고루 잘 먹이고 최대한 많이 쓰다듬어주려 노력했지만, 이 아이가 아프고 있었다는 걸......너무 늦게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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