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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부장 Dec 16. 2020

퇴사, 오우삼 감독의 슬로 액션 한 장면처럼

“두고 보십시오. 나는 여기서 임원까지 해 먹고 은퇴할 겁니다” 평소에 호기롭게 말했어서일까, 어찌해도 그만둘 것 같지 않던 12년 차 직원의 사표에 팀장님은 조금은 놀라는 것도 같았다. 팀장님은 최대한 들어주었다. <이유가 많으니 그냥이라고 할 수밖에>라는 책 제목이 떠올랐으나 일이 너무 많고 몸이 좀 안 좋다는  동서고금 가장 무난한 사유를 말했다. 한때 몸과 영혼을 이 회사에 묻으리라는 꿈도 있었다는 쓸데없는 사족은 뭐하러 말했을까. 다른 불만이나 회사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다 하라고도 했다. 사표를 써야 회사가 비로소 귀를 여는구나. 고착화된 소통의 부재를 실감했다. 어쨌거나 사표는 다시 생각해봐라, 안 들은 걸로 하겠다는 예상되는 대응이었다.


다시 생각할 만한 그 시간이 지났을 즈음, 일과 근무시간애 대하여 어떤 조정을 해줄 것도 같아 보였다. 예상하지 못해서인가 솔깃했다. ‘이렇게 직장을 유지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는데’라며 잠깐 흔들렸다. 준다고 바닷물을 마실 수는 없는 법. 그럼 어쨌거나 한 발이 어중간하게 걸쳐진 상태로 여전히 출퇴근의 고달픔은 사라지지 않은 채 그것이 혜택처럼 보일 수 있는 다른 직원들의 시선도 감당해야 했다. 내가 제안할 수 있는 것은 재택근무였다. 회사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인 것을 안다. ‘직장 상사라면 자고로 부하 직원들 내 눈앞에서 일 시키는 맛이지’하는 무슨 통일신라적 사고방식이라서 일까. 그렇다면 나는 한 점 망설임 없이 퇴사하는 것으로 협상은 결국 결렬되었다. “이렇게 갑자기 그만두면 어떡하냐, 과장씩이나 돼서 회사도 생각해야지” 그제야 나무람을 들었다. 그것도 예상했었다.


나는 내 인격의 완전한 표현을 위해 자유를 원한다. – 마하트마 간디


후임자 채용과 인수인계는 응당 나도 최선을 다 할 생각이었다. 다행히 회사는 약속한 기간 안에 후임자를 채용해주었고 대리 한 명이 입사했다. 어찌 보면 나를 해방구로 인도할 고마운 마중물인 셈이었으니 나는 잘해주었다. 커피도 많이 타 주었다. 회사에 대하여 희망적인 좋은 말을 많이 해주었다. 문제가 될 수 있는 미흡한 업무에도 이기적이기로 한 나는 인자한 미소를 날려주었고 팀장님한테는 순조로운 진행을 보고하였다. 


디데이를 세는 기분은 천국의 문이 열리는 시계 초침 소리 듣는 기분이랄까. 이렇게 나의 퇴사는 아름다운 인수인계와 함께 성공하는 줄 알았다. “그걸 왜 인제 알려주어요? 그럼, 다음 주부터 과장님 없는 거예요?” “네. 나는 대리님이 알고 입사한 줄 알았지요. 괜찮아요, 걱정 안 해도 돼요. 잘하는데요. 뭘” 내가 이번 주까지 근무라는 사실을 알고는 대리는 놀라는 것이었다. 눈이 펭수처럼 커졌다. 안심시킨 만큼 괜찮을 줄 알았다. 


눈이 펭수처럼 커졌다. 안심시킨 만큼 괜찮을 줄 알았다.


그 대리가 다음날 잠적을 해버린 것이었다. 과장 후임자로서의 부담감과 업무 적응에 힘들어하며 고민한 듯하다. 나는 그 대리의 안부나 태도보다 내 퇴사 일정이 미뤄지게 될까 봐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직원들은 이 상황을 어떤 기대감을 가지고 지켜보는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전역 앞두고 발생한 북한 도발에 ‘이대로 제대할 수만은 없다’는 국뽕 드라마를 연출해야 한단 말인가. 아, 퇴사가 생각보다 쉬운 것만은 아니구나.

나는 내 인격의 완전한 표현을 위해 자유를 원한다. – 마하트마 간디


플랜 B로 가자. 잠적 비슷한 어떤 사건도 없었던 것처럼 일부러 근무시간에 박스에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건 그거고 나는 하늘이 무너져도 예정된 퇴사는 하련다‘라는 심정으로 말이다. 나에게 하려는 어떤 말이 있다면, 도로 삼켜달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박스 청테이프 소리에 실어 날려 보냈다. 내가 여기서 물러서면 또다시 한 달을 아니 얼마를 더 출근이 연장될지 모를 일이었다. 민망도 했지만 어떻게 하면 청테이프 소리가 쫙쫙 더 크게 귀를 찢는지 연구하며 단번에 말고 틈틈이 여러 번에 쌌다. 더 출근하라고 하면 내 성격에 나는 거절을 못할 것만 같았다. 내 굳은 심지를 전달할 수 있는 것은 이것밖에 없다고 생각한 나 자신이 유치하고 짠했다. 


짠한 것 또 있다. 보통 퇴사 날은 직원들하고 인사나 하며 차 한 잔 하다 점심쯤 회사를 나가는 것이 지난 관례였다. 어떤 직원은 아예 컴퓨터 포맷을 전날 해버려 놓는 것을 보고는 어이없던 기억도 있었다. 나는 복도 없지. 다시 사표를 번복해야 하나 눈치를 보는 것도 촉수가 곤두설 판인데 차장님은 유난히 옆에 짤 싹 붙어 계속 일을 시키는 것이 아닌가. 퇴사 날 퇴근 시간까지 꽉 채워 업무를 했다. 그렇게 꼴 보기 싫을 수가 없었다. “차장님, 나 작별 인사하게 일 좀 그만 시켜요” 소문 듣고 작별 인사하러 온 타 부서 직원이 오히려 차장한테 꼬챙이 같은 한마디를 나 대신해주었다. 


국방부 시계는 거꾸로 매달아도 돌아간다고 내 천국의 문도 드디어 마지막 째깍 소리를 내며 열렸다. 마지막으로 팀장님에게 인사를 하는데 쳐다보지도 않았다. 돌려버린 고개에 대고 혼자 꾸벅하고는 나와버렸다. 네가 네 죄를 알렸다? 나는 소위 괘씸죄인가? 약간 서글펐다. 나름 청춘을 바친 직장인데 ‘그동안 고생했어’라는 말 한마디가 듣고 싶었다. 

사무실을 나와서 현관을 지나 회사 정문까지 마치 오우삼 감독의 슬로 액션 한 장면처럼 걸어 나왔다. 퍼드덕 날라줄 비둘기까지는 준비를 못했다. 


가슴 뛰게 하는 단어, ‘자유’가 나에게로 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하늘엔 조각구름 떠 있었고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 대한민국이로다. 내일 아침에는 지금껏 보지 못한 새로운 장르의 태양이 뜰 것이다. 야, 기분 좋다.


추신. 예비 퇴사자들이여. 후임자에겐 커피 말고 밥과 술을 사줄 것. 청테이프를 꼭 준비할 것. 실수로라도 컴퓨터 포맷을 전날 미리 해놓을 것. 그래야 일 안 시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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