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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부장 Mar 21. 2021

밭을 갈다. 지구를 갈다


팔순 아빠가 유일하게 스마트폰 검색하는 것은 날씨이다. 여기 밭이 있는, 내가 사는 군산 날씨 검색이다. 감자 심는 날짜 택일을 하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전에 밭을 갈아엎는 로터리 작업을 해야 한다. 그다음에는 고랑을 만들어 검정 비닐을 씌고 비 오기 전에 감자를 심어야 한다. 중간에 비가 오면 흙이 질어서 로터리 작업이나 고랑 만드는 일이 어려워진다. 


작업 당일, 어김없이 아침 대략 8시 정도면 엄마한테 전화가 걸려온다. 밭에 잘 도착했다는 전화였다. 엄마 아빠의 도착을 확인하고는 나도 어서 채비를 챙겨 나가야 할 것 같지만 나는 늘 하듯이 마저 잠을 잤다. 지난밤 늦게 잠들기도 했고, 그거 아니더라도 아직은 나는 아침잠이 많은 틀림없는 청춘이니까. 


나는 해가 중천에 떠서야 먹거리 한 짐과 함께 밭에 도착했다. 엄마 아빠는 이미 보리밭 풀메기를 거의 끝냈다. 나의 밭농사는  안아 드리는 아침인사로 시작한다. 그러고는 고라니에게 뜯겼던 보리싹을 먼저 살폈다. 커다란 바람개비 서너 개를 만들어 꽂아놓았더니 확실히 보리풀이 덜 뜯겼다. 보리는 엿기름을 만들어 식혜를 해 먹을 것이다. 보리싹은 살아났지만 그 고라니는 끼니 한 군데를 잃었으니 굶으며 어딘가를 떠도는 것은 아닌지 미안하기도 하다. 


원두막이며 비닐하우스며 군데군데 뿌려놓은 쥐약에 혹시 밤새 운명한 쥐의 사체가 있나 둘러보았으나 다행히 없었다. 한 해 공들인 메주콩을 무지하게 먹어 치운 작은 녀석이 있었더랬다. 농사라는 게 식물을 다루는 일인데 꼭 그렇지만도 않다. 고라니도 쥐도 생각할 일이다. 생명을 기르면서도 생명을 내치기도 하는 아이러니가 있다. 


비닐하우스에서 자라고 있는 시금치 싹과 쪽파도 확인했다. 무탈하게 잘 자라고 있어서 마음이 좋다. 펼쳐진 어린 배추 싹들의 녹색은 자체로 배경음악이다. 싹들이 스스로 연주하는 전원교향곡이 나는 들리는 것 만 같았다. 


본격적인 아빠의 로터리 작업이 시작되었다. 하지 감자를 심을 자리이다. 엄마와 내가 배추 뽑은 고랑 검정 비닐을 걷어내는 일을 끝내고도 흙들이 뒤집히는 소리가 한창이었다. 아빠는 지금 지구를 갈아엎고 있는 것이다. 약간 감개무량했다. 우리가 지구 한 조각 등기 낼 수 있었던 것은 엄마 아빠가 안 입고 안 먹고 아낀 노령 연금과 내 영혼을 갈아 넣은 퇴직금이 있었기 때문이다. 

보리는 엿기름을 만들어 식혜를 해 먹을 것이다.


나는 늦도록 천진난만했다. 산 아래 마을 꼬마가 제때 세상 물정 알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다 느닷없이 맞닥뜨리는 세상 물정 중에 내가 제일로 신기했던 것 중에 으뜸은 바로 땅에 주인이 있고 그것을 돈 주고 사고판다는 사실이었다. 아. 지구가 따로 주인이 있는 거구나. 지구는 누구 것인가? 지구는 도대체 언제부터 누구의 것이기 시작했을까? 누구는 어떻게 알고 사기만 하면 땅이 대박이 나서 부자가 더 부자가 되는지 그것이 더 믿기 어려웠다.


“생산 3요소는 토지, 노동, 자본”


우리에게는 기억하는 교과서 한 문장이 있다. 암기식 교육의 믿지 못할 굉장한 효과인 것이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바로 답변이 나온다. 그런데 지금 가만히 보면 의문이 든다. ‘노동, 자본’과는 다르게 토지는 공기처럼 애초에 있는 것이다. 그 소유권만으로 생산의 대가를 엄청나게 가져가는 것이 정당한가? 전기 수도 도로 국방 치안 이런 것들을 공공재라고 하는데, 이것보다 더 초 공공재가 있다면 인간이 창조하지 않은 공기라던가 땅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 자본주의도 모르는 소리라고 돌 맞지 싶다. 자본주의라는 말을 단 한 번도 쓰지 않은 자본주의의 아버지인 아담 스미스, 그의 <국부론>의 본질은 국가와 국민이 함께 잘살자는 것이다. 경제학의 창시자이기도 한 그는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도 유명하다. 함께 잘 살 수 있는 제도로서의 정당한 자본주의가 훌륭한 것이지, 없는 사람 것을 더 뺏어 가도 “자본주의는 원래 그런 거여”라는 우리 아빠 말에 진실로 모두가 동의하는 것인가?  

아빠는 지금 지구를 갈아엎고 있는 것이다.

누가 봐도 엄청 먹고살 만한데, 그런데도 더 가지려고 한다는 게 어떤 면구스러움 같은 게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많이 가져도 되나? 없이 사는 불쌍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라고 생각해볼 수는 없을까. 무식하니 도덕에 호소할 수밖에 없는 내가 어이없긴 하다. 그렇지만 제도나 욕망만큼 도덕과 만족도 정말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더 편한 이론이 있긴 하다. 인간은 사이좋게 나누어 가질 리가 없게 진화했다는 이론 말이다. 그게 생존에 유리했다는. 차라리 진화심리학의 영역으로 접근해버리는 것이 마음은 더 편할 것도 같다. 나보다 세상 물정 더 잘 아는 친구와의 대화에서도 딱히 논리 따위는 없다. 


“모든 지구인이 지구의 주인인데, N 분의 일은 아니더라도 그 유사한 방법이라도 있지 않을까? 나눠가져야 맞지. 왜 몇 명이 지구를 다 가지도록 내버려 둬야 하는 거야?” “또 그 지구 타령이냐? 그걸 어떻게 나눠 가지냐? 너 이쯤 되면 그거 망상이야” 


그런데 여기, 이 사람을 보라. 바로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이다. 은퇴 후 부인과 시골 경북 경산에 내려가 텃밭농사를 하며 여생으로 자유, 자치, 자연 3자 주의를 실천하며 평화 사상 연구를 하는 분으로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손꼽는 현대 지식인 중 한 분이다. <오리엔탈리즘>의 에드워드 사이드를 국내에 처음 소개한 걸로 유명하다. 그의 인터뷰 기사를 우연히 보고 나는 끓는 주전자 뚜껑처럼 가슴이 들썩거렸다. 우리 국토에서 경작 가능한 땅을 7천만 인구로 나눴을 때 한 사람에게 300평씩 돌아가는 것으로 계산되어 자신과 부인 몫을 합한 600평의 땅만큼만 샀다는 이야기였다.


“그것 봐. 이런 생각하는 사람 있다니까. 한반도 인구로 나눴다잖아. 내 생각이 망상이 아니었어“ 라고 나도 모르게 혼자 외쳤다. 초강력 한 부동산 정책이 시행되든, 지구인이 모두 동시에 도덕적으로 변하든, 어떻게 해서든지 토지로는 더 이상 큰돈 버는 게 아니여야 한다는 것, 이것을 하자는 것이다. 


산 아래 꼬마는 이제 세상 물정 아는 어른이 되었다. 부동산은  정보와 재력을 기득권들의 독무대가 될 수밖에 없다는 정도는 알아버렸다. 슬픈 일이다. 부동산 값이 자고 일어나면 뛰었다며 영끌하지 않은 자신이 벼락 거지가 되었다는 뉴스들이 심심찮다. 그것은 정상이 아니라고, 야만이라고 해설해주는 언론도 찾기 어렵다. 


생각이 많은 사이 아빠는 지구 갈아엎는 작업을 마쳤다. 아빠도 애썼고 지구도 고생이다.  



 [인터뷰] 르네상스적 지식인 박홍규
 원문보기 : http://www.hani.co.kr/arti/area/area_general/85917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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