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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부장 Mar 20. 2021

내가 아는 그 농협?

이른 아침부터 전화기에서 아빠의 이름이 울렸다. 아빠는 늘 다음 주의 농사 일정과 작업 내용과 또 내가 따로 준비할 것을 먼저 일러준다. 이번 주 내가 할 일은 ‘비료 구매할 것. 퇴비 입고 신청할 것’이었다. 


사무실 책상에서 컴퓨터로 일만 하던 나는 농사라고는 당연히 작은 거 하나라도 알아서 할 줄 아는 게 없다. 그저 아빠가 시키는 거나 물어물어 해결하면서 아직은 ‘농사의 세계’ 변두리에서 서성대는 정도이다. 모양새는 마치 대기업 후계자 경영 수업하듯이 실무 바닥부터 밟아 올라가는 코스처럼 보이지 않는가? 오빠는 나보다 농사를 더 싫어하니 마침 경쟁자도 없다. 합병이나 지배구조 재편도 필요 없다. 이렇게 무난한 승계가 있을까. 그럼에도 나는 아빠 농사의 후계자로 나설 마음은 없다. 

시금치사이 풀을 메고 있는 엄마

아빠는 내심 당신이 건강하실 때 잘 가르쳐서 나를 어엿한 농부로 만들려는 큰 그림을 그릴지도 모른다. 나는 우리 가족이 함께 추억을 쌓아가는 의미로 이 밭농사일에 애정이 크다. 내가 뭘 할지는 그때 생각하고 싶다. 지금은 농부 코스프레하며 흙과 푸른 하늘 보러 다니는 것이 너무 좋다. 내가 준비한 점심을 밭에서 우리 셋이 맛있게 먹을 때, 행복은 거기 있다.


엄마는 땅 사는 거부터 반대했다. 언제나처럼 엄마의 의견은 별로 힘이 없다. 마을 경로당에서 10원짜리 화투로 240원을 잃고 속상하지만 그러고는 또 일일드라마 보며 다 잊어버리는 엄마는, 밭에 오는 날이 가까워오면 반갑지만은 않다. 사람이 일이 없으면 몸이 굳어버려 못 쓴다며 늘 적당한 노동으로 건강을 유지하는 아빠한테는 소일거리일지라도 엄마에게는 고된 노동이다. 

퇴비 입고 미션 완료

“네 아부지 부지런해서 내가 이 나이에 고생이다”란 말을 나는 여러 번 들었다. 아빠는 밭일에 서툰 엄마를 못마땅해한다. “아빠. 우리 셋이 세트로 움직이는데 엄마가 병나면 우리는 다 꼼작 못해. 엄마니까 아빠 따라다니며 이 나이에 농사일하지. 누가 한다고?” 아빠는 이렇다 할 대답은 없지만 엄마를 존중해달라는 뜻으로 들은 것을 나는 안다. 사실은 밭농사 시작하고부터 아빠는 전보다 엄마를 더 챙기기는 한다. 


일단 나는 비료부터 구매하자. 내가 받은 미션은 ‘농협에서 비료 사 오기’다. 내가 아는 그 농협? 재차 확인까지 했다. 번호표를 뽑았다. 내 차례가 되어서 창구로 다가가면서도 이건 아닌 거 같은데 싶더니 결국 아니었다.”아, 고객님. 농협은 농협 맞는데요, 비료는 농자재 농협으로 가셔야 해요” 아니 그런 농협이 있다고? 거긴 또 어딘가? 어쨌거나 농협은 농협이니까 아빠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나는 다시 차를 돌려야 했다. 여하튼 하나 배웠다.


그다음 배운 게 또 있다. 퇴비에 대한 이야기이다. 퇴비 신청하라는 문자를 받고 면사무소를 방문한 것은 두어 달 전이었다. 문자를 보고 왔다고 하면 나랏일 하시는 분들이 다 알아서 해주는 줄 알았다. 건네받은 신청서에 기본적인 사항을 적어나가는데 퇴비업체 이름을 적는 칸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시험문제 풀다가 공부 안 한 게 나와서 딱 막힌 기분이었다. 내가 알아서 쓰라는 것이었다. 농사가 처음이니 퇴비업체를 내가 알리가 있나? “그럼 퇴비업체 명단을 보여줄 테니 선택하세요” 자신들은 업체에 대하여 일체 정보가 없으며 신청만 받아준다는 것이다. ‘움, 그렇구나’ 대략 훑어보고 하나를 골랐었다. 모를 때는 대개 긴 게 정답이다. 그렇게 신청만 해놓은 상태였다.


아빠의 미션에 퇴비 입고 날짜를 확인하러 그 업체에 전화를 했다. “이 번호는 없는 번호이니 확인 후 어쩌고저쩌고……” 너무도 익숙하지만 반갑지 않은 멘트였다. 면사무소에서는 아무 일 아니라는 듯이 그렇다면 농자재 농협이란 곳을 찾아가 보라고만 알려주었다. 아! 또 그 농자재 농협이구나. “그 업체는 망해서 문 닫은 지 몇 년 됐어요. 면사무소 직원이 그런 거 알간디요” 농자재 농협에서 정상적인 업체를 연결해주어서 해결이 되었다. 폐업한 업체를 면사무소에 알려줘야 하나 잠깐 생각했다. 업무상 도움도 줄 겸 목록 점검 좀 하시라는 고객 불만도 얹을 겸 말이다. 아니다. 프로 오지라퍼가 되기가 좀 걸쩍지근했다.

배추 모종 받아오던 날

이번에는 ‘배추 모종 무료 공급’ 안내 문자였다. 발신인에게 전화해서 공급 장소를 확인했다. 또 틀림없이 농협이란다. 다시 확인했다 “농협이라고요?” 또 번호표 뽑고 대기했다. ‘농협이 언제부터 배추도 나눠준겨? 여기 배추 모종이 있다고? 내가 모르는 뒷마당에 있나 부지, 뭘’ 내 차례가 되어서 창구로 다가가면서도 또 이건 아닌 거 같은데 싶더니 결국 아니었다. “아, 고객님. 농협은 농협 맞는데요, 배추는 육묘장 농협으로 가셔야 해요” 일단 창피했다. 다음 벨 소리를 기다리며 통장을 들고 대기 중인 고객들이 나의 “배추 주세요”를 들은 것만 같아서 말이다. 


내 잘못이 아닌 것으로 헛걸음하면 시간도 아깝고 진짜 속상하다. 왜 처음부터 정확히 알려주지 않냐고? 당신들이 아는 걸 초보도 다 안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알려주고 싶었다. “아이구, 당연히 농사 지시면 다 아는 줄 알었지유. 농협이 여러 개여요. 이참에 이런 농협 저런 농협 하나하나 알아가시면 좋지요 뭐. 허허허”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사람 좋은 웃음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구수하게 들려왔다. 내가 융통성 없고 멍청한 걸로 하고 전화까지 하지는 말 걸 후회했다. 


모든 게 거시기로 통하는 게 가능하다더니 여기야 말로 농사는 농협이면 다 통하는 세계이었다. 농협 다니는 오랜 친구가 있어서 농협이 마냥 친근하게만 느껴졌지 농협의 종류가 이렇게 많은지 몰랐다. 농사 월드가 곧 농협 월드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닌 듯하다. 


검색해도 다 나온다거나 무엇이든 물어보는 포탈 지식도 현실에선 쓸모없을 때가 발생한다. 정보 공급자와 수급자 사이에 깊고 넓은 상식의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같은 언어 다른 생각’이라는 함정 투성이다. 평생 직장생활하고 은퇴한 남성이 사회에 나오면 초등학생이나 마찬가지라더니 내가 딱 그 모습이었다. 어쨌든 또 하나 배웠다. 


나의 좌충우돌 농협 투어 하는 사이에 전 주인이 심어놓은 산수유가 소리소문없이 나무를 뚫고 피어버렸다. 노란 물감 툭툭 떨어뜨린 수채화를 보며 저절로 지어지는 그 미소면 되었다. 봄이니까.


농부와 산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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