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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부장 Aug 31. 2020

나뷔와 벙벙이

그때 ‘버킷리스트’가 유행이었다. ‘동물과 같이 살기’를 세 번째쯤에 적은 기억이 난다. 요즘 ‘나만 없어 고양이’라는 유행어가 있지만 그땐 고양이 유튜브의 조회 수가 몇백만 인 시대가 올 줄 몰랐을 때이고 ‘휴머니멀’이란 신조어는 당연히 없을 때이다. 버킷리스트란 게 본래 미래에나 생길 법한 신조어스런 꿈이 들어가야 뭔가 있어 보이는 법이다.
 

벙벙이를 처음 본 나뷔, 난 인간인데 넌 모니?

  

나뷔의 텃새로 궁지에 몰린 벙벙이

 그렇게 나는 집사가 되었다. 다음 해에 둘째를 입양했다. 같이만 살면 자기들끼리 친해지는 줄 알았다. ‘고양이 합사 매뉴얼’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둘은 서열 정리를 위한 푸닥거리를 치른 후였다. 따로 놀기로 한 모양새로 결론지어진 듯하다. 한 집에서도 서식지가 달리하며 같이 있는 일은 없다. 어쩌다 서로의 동선이 우연히라도 겹치면 잠깐 대치의 긴장과 냥 펀치를 짧게 주고받고는 이내 서로 갈 길을 갈 뿐이다. 출근 후 빈집에서 서로 의지하는 아름다운 풍경은 나의 미숙함으로 날아가 버렸다. 어쨌든 둘 다 나를 좋아하지만 서로는 여전히 대면 대면한 것이 내 탓인 거 같아 미안하기도 하다. 

텃새가 심한 나뷔,  야, 어딜 나와?

두 고양이와 살면 어떻게 좋냐는 질문을 받고는 한다. ‘자식이고 가족이지’라는 답변은 기본이다. 내 삶은 고양이를 만나기 전과 후로 나뉜다는 말도 반드시 덧붙인다. 나는야 고양이 왕국의 절대 지존, 권력의 맛을 보았다. 2인자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김재규와 차지철, 그 둘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일인자 박정희의 비열한 희열 같은 거. 장르는 궁중 누아르라고나 할까?

빠르게 어항까지 접수한 벙벙이

 
첫째는 둘째에게 질투가 나서 텃세가 심했다. 어떤 공간도 내어주지 않는 첫째 때문에 구석으로 몰린 둘째는 차차 첫째의 영토를 정복해갔다. 결코 가만히 있지 않고 벙벙대는 모양새 때문에 ‘벙벙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벙벙이는 어항을 시작으로 소파까지 빠르게 접수하였다. 그다음 안방 진입 작전을 마침내 성공하였고 마지막 고지전인 침대를 향한 격렬한 전투는 이제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누가 집사와 잘 것인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려는 자와 뺏으려는 자. 

   

여전히 대면대면한 둘을 보면 내탓인거 같아 미안하다


침대 전투를 앞두고, 지키려는 자와 뺏으려는 자


이긴 자의 편안한 잠, 패배한 자의 저 눈빛

그날 결투에 이긴 녀석은 내 품에서 잠드는 영광을 누린다. 난 승자의 골골송을 감상하면 된다. 패배한 녀석은 내 발 밑에 처참하게 널브러져 눈물을 삼키며 지난 전투를 복기해본다. 나는 그들의 결투를 지켜볼 뿐 개입할 수 없다. 

  

  예쁜 여자애는 꼭 못생긴 애들과 친한 법. 내 친구들은 늘 예뻤다. 내 친구를 사이에 놓고 남자 동기들이 벌이는 결투는 종종 있었고 그 바닥에 유명했다. 남자들이 귀찮다고 하지만 은근히 인기를 즐기는 내 친구를 안 부러워했다면 거짓말이다. 예쁘다는 칭찬을 일가친척 누구에게도 받아본 적 없는 나는 일생에 일초도 그 친구 같은 일은 없다고 생각해왔다. 아예 꿈조차 꾸지 않았다. 


사실은 나도 상상해보긴 했다. 내가 엄청나게 예뻐서 가만히 있어도 남자들이 우글우글. 그 기분은 어떨까. 세월이라고 불러도 될 기간, 반백 년 살아보니 그 부러움은 그냥 깨알 같은 추억이다. 유치원생 같은 유치한 꿈이다. 고양이들이 내 품을 서로 차지하려는 상황이 꼭 그 상상과 비슷하다는 혼자만의 망상을 잠시 했다. 꿩 대신 닭이라고 남자 대신 고양이? 그냥 웃자. 
 
고양이의 체온은 인간보다 2도가 높다고 한다. 내가 고열에 몸살이라도 나면 고양이는 자신보다 따듯한 나를 더 파고든다. 혼자 살면서 아픈 날은 더러 있지만 꼭 오늘을 못 넘길 것만 같은 호되게 앓는 날이 있다. 오늘 밤 내가 죽으면 우리 고양이들은 어떡하지? 사료를 다 먹도록 아무도 찾아오지 않으면 먹을 게 없을 텐데. 내가 죽은 것도 모르고 자는 줄만 알고 밥 달라며 계속 깨울 텐데. 대답 없는 내 곁에서 우리 나뷔와 벙벙이가 굶고 있을 상상을 하니 주책맞게 눈물부터 글썽인다. 만일에 그런 일이 진짜 벌어진다면 어떻게든 구조될 때까지 차라리 나를 먹고 우리 고양이들이 살아있어 주길 나는 정말 바란다.
 
이제는 잠자리로 싸우지 않는다. 서로 동맹을 맺었는지 양쪽에서 공평하게 팔베개를 한다. 나는 불편한 십자가 자세로 잠들지만 말할 수 없이 행복하다. 십자가를 베고 나를 사랑으로 구원할 그 이름, 고양이. 주어진 생을 오롯이 그대로 다 살고 나중에 무지개다리를 건널 때 ‘잘 먹고 잘 쉬다 간다’는 눈빛이었으면 그것으로 바랄 게 없겠다. 나에게 고양이는 오직 ‘사랑’이고 오로지 ‘사랑’이며 다만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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