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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부장 Oct 27. 2020

나는 실버댄스반

열 달 정도가 지났다. 허리 디스크 수술 후 이 정도 회복 기간이면 남들은 벌써 건물 벽도 오를 정도이다. 난 타고난 약골이라 이제야 좀 거동이 자유로와 졌다. 돌아다니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했다. 수술 전에 내가 했었던 모든 취미와 문화생활을 다시 되찾고 싶은 마음이 여간 간절했다. 나의 허리 상태에 맞추어 포트폴리오를 다시 짜야 했다. 수술 전 몸담았던 설장구나 봉사활동은 아직은 어려울 듯하다. 


대학병원 초음파 검사하듯 지역 정보를 샅샅이 탐색하던 중 내 동공이 멈추는 기사를 발견했다. 읍사무소에서 운영하는 댄스반이었다. 에어로빅이나 줌바댄스는 동작이 세서 내 몸으로는 부담스러울 듯했고 라인댄스와 실버 라인댄스 중에 나는 망설임 없이 선택했다.


“선생님, 라인댄스 등록하고 싶은데요?”

“몇 살이신지여?”

“네. 사십하고도……” 

남은 뒷 수자는 듣기도 전에 전화선 너머 선생님은 말했다.

“여기는 실버반이에요. 다 65세 이상이에요”

“네, 선생님. 실버반 알고 연락드렸습니다. 제가 몸이 썩 건강하지 않아서요, 어르신들보다 아마 제가 더 몸치일 것 같아요, 저한테는 실버반이 정말 맞을 거 같아고 이 운동이 너무 하고 싶어요. 선생님. 받아주시면 안 될까요?”


 드디어 첫 수업 날이다. 말할 수 없이 기뻤고, 웃을 때 초승달로 변하는 선생님의 눈은 정말 갖고 싶은 명품 미소였다. 말씀은 더 명품이었다.


“어르신 여러분, 오늘 처음 온 수강생이 있어요. 보았지요? 근데 젊어. 내가 오라고 했어요. 우리 어르신들요, 할 수만 있으면  젊은 사람 하고도 섞여 지내야 좋아. 그리고 무엇보다 운동이 너무 하고 싶다는 말이 진심으로 와닿았어요. 같이 해도 괜찮지유?"


 내 부모님 얼굴을 하신 어르신들과 멋진 언니 하고 싶은 선생님 모두 나를 환영해주셨다. 나는 행운아다. 그저 난 성은이 망극할 뿐. 역시 경력직이 무섭다고 어르신들은 이미 몇 년째라서 스텝을 다 외우고 계셨다. 착착 발맞추시는 폼이 예사롭지 않다. 전주곡만 듣고도 들썩들썩 여유롭게 리듬을 타셨다. 유행가 가사 말처럼 ‘예상은 빗나가기 쉬울 수밖에’ 실버반이다 보니 스텝이 단조로울 거라는 예상은 빗나갔다. 


  나는 헷갈려서 쭈뼛쭈뼛 어정쩡하게 따라 하기에 바빴다. 너무 틀려서 창피하지만 신나는 노래가 있어서 연신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나마 아는 노래 ‘찔레꽃’은 안 따라 할 수가 없었다. 

여기는 실버라인댄스반


사람이 뭔가를 추구하고 있는 한 절대로 노인이 아니다.
 -진 로스탠드



 선생님이 뿜어내는 모든 것은 유연하되 짱짱하고, 우아하면서도 마력적이다. 댄스만 하는 것은 아니다. 한 곡 마치고 다음 곡 사이에 선생님의 특급 구호가 일품이다. 오른손 손가락 5개를 쫙 펴서 팔을 앞으로 뻗으며 큰 목소리로 선창을 하시는 게 아닌가. 


“우리는 누구?”


‘잠깐. 설마, 이 포즈는 인류의 구원자이자 히어로인 아이언맨이 손바닥에서 로켓을 발사할 때의 그것인데, 그렇다면 우리 반 단체 구호가 우리는 아이언맨이다? 와우, 이렇게 신박할 수가.’ 상상하는 동안 어르신들은 팔을 뻗어 아이언맨 포즈로 외치셨다.


“우리는 오십이다! 우리는 오십이다!”

“어르신들, 젊고 활기차게 사세요. 쳐져계시면 보기도 안 좋고 자녀들도 싫어해. 알았죠?”


역시 우리의 위대하신 영도자와 어르신들답다. 이제야 여기가 실버반이라는 실감도 했다. 

다음 수업을 기다리는 어느 날, 주춤하던 코로나가 한반도에 다시 창궐하여 우리 실버댄스반은 갑자기 휴강에 들어갔다. 잘 지내란 인사도 없이 헤어진 채 다시 개강은 그 후로 한 달이나 지나서였다. 어르신들도 나도 마치 해방된 조국에 만세 부르러 나오듯 모두 나오셨다.


“아이고, 이거 한 달 못항께 사는 게 재미가 음써.”

“그려, 나이 60 넘으면 재미난 게 없다더니 진짜여. 근데 이거만 재미나”

“나는 그동안 다른 운동 해긴 해는디 이것만 못해. 영 지루해 당최 못쓰겄어.”


춤 신들의 주옥같은 추천사 한 마디씩이 쏟아져 나왔다. 중간에 청일점 어르신께서 홍삼 캔디 한 봉지를 나눠주셨다. 쉬는 시간마저 달달하고 건강하게 느껴졌다. 청일점 어르신은 선생님의 무겁고 큰 스피커를 매번 들어주시는 짐꾼을 자처하시는데 인심마저 좋으셨다. 나는 출석한 지 몇 번 안되어 어르신들과 아직 친하지는 않다. 이름 외우는 것도 잘 못한다. 이제 한 분 한 분이 궁금해졌다. 오래오래 좋은 댄스 친구가 되고 싶다.


나한테 맞는 취미를 찾는다는 것은 운전면허 합격한 거처럼 기쁜 일이다. 벌써 십 년 전, 댄스가 그랬다. 슬프게도 오래 못 갔다. 허리가 아프고부터 운동화만 신어야 했고 ‘난 이제 댄스는 못 하겠지’ 하며 중고나라에 팔은 댄스화가 요새 어른거린다. 그 은색 찬란한 더블 라인, 도도한 높은 굽의 화려한 자태. 한때나마 내 정열의 동반자, 그 녀석을 곱게 포장하던 그날이 생각났다. 떠나보내기 전 찍어둔 댄스화 사진을 꺼내 보며 회상에 잠시 잠겼다. 이렇게 다시 주어진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 어르신들과 다시 시작할 테다.

중고나라에 팔은 댄스화가 요새 어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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