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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부장 Oct 22. 2020

아프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건강한 몸을 가진 자가 아니고서는 조국에 충실한 자가 되기 어렵고, 좋은 아버지, 좋은 아들, 좋은 이웃이 되기 어렵다. - 페스탈로찌


나는 늘 아프다. 내 몸이 감옥 같다. 나는 내 몸에서 징역살이를 하고 있다. 가석방도 없는 종신형의 형벌이다. 처음부터 타고난 약골은 아니었다. 학원 강사였는데 천성이 말소리가 크고 목 관리에 소홀하니 목감기를 달고 다녔다. 그 후로도 꾸준히 성실하게 아픈 덕에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떠보니 저 체질에 저 체력의 아이콘이 돼있었다.


봄과 가을은 환절기라서, 여름은 에어컨 때문에, 겨울은 찬 공기 때문에 다 각각 합리적인 원인으로 감기를 달고 산다. 내 조국은 아름다운 금수강산, 사계절이 뚜렷한 살기 좋은 대한민국. 금수강산이 아름다운 건 동의하나 사계절이 살기 좋다는 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라 동의하기 힘들다.
 
 내 사전에 제일 싫은 말 세 가지를 꼽으라면 첫째 ‘감기’, 둘째 ‘야근’, 셋째 ‘감기 걸린 날 야근’이다. 내 감기의 의학적 명칭은 아마 ‘상열하한증을 동반한 환절기성 찬 공기 알레르기에 따른 만성 비염 갱년기 감기’ 정도 되시겠다. 나만 아는 병. 나니까 아는 병. 신상 몸을 쿠팡에서 부위별로 구매하여 교체하고 그런 거, 하고 싶다.


차라리 다시 태어나는 게 빠르지 않을까. 새 몸 새 세상. 생각만 해도 이두박근, 삼두박근, 승모근이 돌림 노래하듯이 돌아가며 불끈불끈한다. 아픈 데가 싹 고쳐져서 나오는 캡슐인가 그것도 나쁘지는 않은데. 아이고,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게야. 좌우지간, 불가능한 꿈을 상상해본다.


신상 몸을 쿠팡에서 부위별로 구매하여 교체하고 그런 거, 하고 싶다

  

그래, 어르고 달래서 잘 고쳐 써야지.  버킷리스트 마지막 번호에 장기 기증과 시체 기증을 적었다. 아직 실천한 것도 아니지만 보람되고 뿌듯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꾸준히 아팠다가는 뭐 하나 남겠나 노파심이 안 들 수가 없다. 왜냐면 내 병에는 관성과 가속도의 법칙이 작동하니까.


사실은 이 사회가 허락한다면 기증보다는 풍장이 더 내 취향이다. 생의 마침표로 그만한 세리머니가 없지. 아름다운 에코시스템, 대자연의 착한 순환. 어쨌거나 바람 끝에 벚꽃 묻어나는 어느 날에, 나는 풍장이 하고 싶다. 이 글을 마치고 어제처럼 불면증이 찾아오면 난 국민청원을 하리다. ‘나에게 풍장을 허하라’


직장 생활에서도 아프다는 건 여간 눈치 보이는 게 아니었다.  직장이란 곳이 본래 업무평가라고 쓰고 이미지평가라고 읽는 곳이 아닌가. 그래서는 아니지만, 나는 불도저처럼 야근했고 내 한몫 이상의 일 처리를 해냈다. 마치 ‘한강의 기적’ 같은 내 병의 눈부신 발전과 성장에는 야근의 공로가 지대하다. 밤에도 일을 하게 해 주신 에디슨 형님은 후손 야근인들의 원망을 그 어찌 다 감당하고 계실꼬? “또 야근?” 보다 제일 듣기 싫었던 말은 “또 아파?” “아직도 아파?” 였다. 대체 이 감기는 지난주 그 감기인가? 아니면 다 낫고 다시 걸린 새 감기인가? 됐고 제발 신경 꺼주길 바란다.


입사 후 첫 연차 휴가를 쓸 때가 생생히 기억난다. 아, 오해는 하지 말아 주시길. 결코 아플 때마다 휴가를 그렇게 노상 쓰지는 않는다. 아픈 만큼 성숙해지지 않는다는 것과 하루 쉰다고 결코 낫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학습효과로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차라리 출근하는 것이 더 효용이 있다. 하지만 그날은 정신 못 차릴 정도로 죽겠는 날이었다.


 “낼 쉰다고?”
 “넵. 대리님”
 “왜?”
 “넵. 제가 몸이 안 좋아서요”
 “덩치는 소도 때려잡겠는데“
 

대리님의 마지막 말씀은 혼자말인 듯 혼잣말 아닌 혼잣말 같았다. 이 언어폭력의 본질은 무엇인가? 직장 갑질인가? 외모 비하인가? 성희롱인가? 동물 비하인가? 나한테 때려 잡힐 운명의 그 소는 또 무슨 죄란 말인가? 그냥 잡는 게 아니라 ‘때려’ 잡는다는 그 친절한 디테일에 나는 그만 사무실 콘크리트 바닥을 뚫고 아래로 한없이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

  

꾸준히 성실하게 아픈 덕에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떠보니 저체질에 저체력의 아이콘이 돼있었다.

  밖을 나와도 아프고 들어가도 아프다. 집에서 누워 있자면 드는 생각이 “이래저래 아프긴 마찬가지이니 어차피 아픈 거 돌아다니기라도 하자” 하고 적극 외출도 해본다. 시동 걸고 출발해서 첫 신호등 아래쯤이면 어김없이 홍수같은 땀에 바로 후회한다. 본디 갱년기란 스스로 그런 것. 에효, 집 놔두고 뭐더러 나와서 고생이람. 그래도 엑셀은 밟으라고 있는 법, 컴온~렛츠 고~. 외출해서 만나게 되는 내 조국 대한민국 시민들은 내 옷차림으로 인사하는 것을 참 좋아한다. “그렇게 춰요?” “얼어 죽네” 나는 입 앙다물고 각양각색 톤의 같은 말을 들어야 한다.


한 친구는 회사 다니면서 남편 건사하며 자식 키우고 가사노동 전담에 불편한 친정 엄마 병시중, 그러면서 야간대학교도 졸업했다. 게다가 블로그도 열심히 한다. 미스테리한 것은 이 친구야말로 살아서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란 사실이다.  친구는 대체 그 많은걸 어떻게 해내는 걸까? 그 바쁜 와중에 손오공의 분신술까지 터득하다니. 대체 그 학원은 어디 있는 거지? 출근할 직장도 없고 딸린 식솔까지 없는 내가 어지간히도 한심해 보일 것이다. 허나 어쩌랴, 남의 중병보다 내 손톱 밑에 가시가 더 아픈 것을.


‘생로병사’ (生老病死)에서 ‘생’生은 반 세기 전에 완벽하게 모친의 죽을 힘 덕분에 임무 완수했고, 지금 나는 ‘사’死로 내달리는 ‘노병老病열차’에 타고 있다. 멈추지 않는 열차이고 내가 좀 이르게 승차했나 보다. 괜찮다. 생명의 이유는 그저, 살려고 왔고 살았으면 지는 것이니까. 행복하려는 계획이 인간에게 큰 불행을 가져다주듯이 건강하려는 내 욕망이 내 병을 돋우는 거라며 맥락 없이 갖다 붙여보기도 해 본다. 그냥 이 생에선 애쓰지 말자라고도 해본다. 혹시 알아? 포기하면 선물처럼 건강이란 택배가 문 앞에 와있을지. ‘내려놓음’이라는 놈에게 과하게 바라보는 것도 굳이 안 할 필요가 없다.


오늘도 으슬으슬한 몸과 더 말똥말똥해지는 정신이 서로 화해하지 못하는 새벽이다. 이불을 끌어 잡아당기고 나는 티벳 싱잉 볼 연주를 들으며 오지 않는 잠을 청해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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