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X년 12월 1일 재수없는 날
XX년 12월 1일 재수없는 날
내가 왜 죽고 싶냐고, 왜 죽었냐고 하면서 물어본다면 다 재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속으로는 세상이 귀찮다고, 살기 싫다고 라고 생각할 것이다.
친구들만이 오직 내 곁에 있을 뿐. 아무도 나를 좋아해 주지 안는다. 너무 슬프다. 친구들마저 나를 버릴까봐 두렵다. 나한테는 진정한 친구. 오직 OO만 있을 뿐이다. XX가 제외되어 좀 슬프긴 하지만.
내가 죽은 것을 안다면 나를 아는 사람들은 놀랄 것이다. (난 그렇게 생각된다.)
왜냐면 나는 굉장히 활발한데다 친구들이 꽤 많기 때문이다. 나는 공부를 못한다. 허수아비처럼 배운 것만 중얼거리는데다가, 남을 따라해서 약간 덧붙여 주기만 한다. 이 사실을 친구와 외부 사람들은 전혀 모른다.
내가 공부를 잘 하는 줄만 안다.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답답하다.
100점만 맞으면 공부를 잘하는 줄 알고, 수업시간에 적극적이기만 한다면, 모두가 공부를 잘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정말 이상하다. 황금만능주의와 비슷한 것 같다. 만약 내가 살아간다면, 평생동안 사회를 비판하며 살아갈 것이다. 겉만 보고 판단하는 나와 같은 쓰레기 같은 인간들........
정말 살기 싫다.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답답하고, 살기 싫다. 난 지금 누굴 위해 살아가는 것 같다.
엄마도 날 피한다. 내 동생만 위하고. 이건 과연 질투와 이기심의 일종일 뿐일까? 내가 왜 태어 났을까?
세상 사람들은 모두 날 싫어 하기만 하는데 너무 슬프다. 사람들에게 내 생각을 전하고 싶지만, 모두 들어 주지 않는다. 답답해 미칠 것만 같다. 두렵기도 하다. 내가 만약 살아서 세상을 헤쳐나간다면 아마 미쳐버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죽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날 위해주는 사람들도 많지만.....
죽는 이유:
15%=엄마, 동생과의 갈등, 싸움
18%=친구들의 무서움, 따돌림 당할까봐
27%=세상이 싫어. 무서워.
40%=살기 싫어. 왜 살아?
당연한 이야기지만, 초등학생도 삶을 진지하게 고민한다. 저 유서를 훈민정음이라는 프로그램으로 쓰고 프린트를 해놨었다. 이건 그 시절의 흔적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다. 두 번째 전학, 세 번째 학교. 가족들은 전학 타이밍 같은 걸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4학년 말, 각자가 속한 반에서 공고한 관계를 만들어낼 때 나는 그 틈을 비집어야 했다. 낯선 이, 그러니까 나는 이유불문하고 경계대상이었다.
어떤 의욕도 없었고 소속감도 없었다. 위안은 간절히 바랐지만 이뤄지지 않았다. 이 유서를 썼던 때와 이때의 기분, 이런 글을 쓰고 내가 어떤 일을 했었는지 또렷히 기억이 난다. 그런걸 보면 꽤나 진심이었던 것 같다. 또래 공동체와 가족에게서 안정적인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건 퍽 지치는 일이다. 나는 그 후로도 전학을 한 번 더 갔다.
어릴 때는 포장을 잘 못했지만 지금 와서 얘기하면 지적 열등감을 전부터 안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아는 세계는 무척이나 단편적이어서 창피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내 옆에는 지적 수준을 언급하며 칭찬하는 이들이 있었고 그게 창피했다. 누군가를, 정확히 자신을 속이는 것만 같아서. 그런 마음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초등학교 때 쓴 위의 글을 보면 나란 인간은 친구나 가족 등 인간 관계에 지나치게 민감한 사람이라는 게 드러나 있다. 그저 내가 한 일로 이 사람이 내게 실망했을까봐,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을까봐 안절부절하는 모습은 하나도 성장하지 않았다.
어린 나의 유서는 힘든 걸 알아달라는 내색이었다. 누구에게도 보여주진 않았지만. 정말 죽으려고 했던 건 아니었다. 서서 전신거울을 보며 목을 졸라봤지만 그런 스스로의 모습이 짠하게도 너무 정면에서 보였고, 숨을 못 쉬겠어서 살기로 했다.
그때의 마음은 여전히 생생할 정도로 힘들었지만 상황은 시간이 어느 정도 무마해주었다. 예견대로 사회를 시니컬하게 바라보며, 예견과 달리 미치지 않고 살아 가고 있다. 남겨둔 고민은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비슷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