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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림 Mar 11. 2024

2024년에 읽은 장강명 <표백>

의외로(?) 재밌었다..



이상하게 한국 현대소설을 읽을 때면, 남이 타준 믹스커피를 평가질하는 옛 시대의 부장 아저씨 모드가 된다. 드라마 '무빙'의 문성근 배우가 분한 민용준 차장처럼 앉아있기만 하는 주제에 프림 비율이 이게 모얏! 하는 느낌이랄까.


디즈니코리아 드라마 <무빙>



한국 현대소설을 읽을 때 나에게 프림과 설탕은 주인공의 서정과 의식이다. 개인이 자신의 세계 안에서 어디까지 파고드는지가 서정이라면, 개인이 자신의 세상을 얼마만큼 안고가는지가 의식이다. 서정과 의식의 밸런스는 읽을 책을 선택할 때 중요한 기준이 된다. 서정이 과하면 작품에서 어떤 의미를 건져야 할지 어리둥절해진다. 의식이 과하면 소설 같지 않아 재미가 없어진다. 소설은 신문이나 사회과학서가 아니니까.





2011년의 <표백>을 2024년에야 읽은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기자 출신 작가의 소설, 게다가 청년 문제를 짚었다니 의식이 과한 작품인가 싶어 선뜻 손에 가지 않았다. 주인공이 맥주 한 캔에 위안을 찾는 모습이 나 같다며 추천해준 누군가가 아니었으면 영영 안 읽었을지도 모른다.



장강명 작가의 장편소설 <표백>은 그런 의미에서 적당히 단 믹스커피 같았다. 대학생 등장인물들이 저마다 안고 있는 고민과 이들의 관계 맺음을 흥미진진하게 직조하는 동시에 이들이 속한 사회를 '표백 세대'라는 잘 벼린 칼로 해체했다. 동시대의 독자가 똑똑히 현실을 응시할 수 있도록.



박탈감과 좌절감은 뿌리 깊이 박혀 있지만 이런 좌절감은 집단적인 분노로 발전하지 못한다. 투쟁은 손해 보는 일이라는 것을 모두 다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 게시판에서는 선배와 상사, 기성세대를 찢어죽일 것처럼 성토하다가도 면접 시험장에서는 한없이 고분고분해지고 공손해진다. 패배를 자연스러운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이들 중 몇몇은 정면 승부를 벌이고 작은 이득을 위해 아득바득 싸우는 태도를 촌스럽다고 여기게 된다. 기왕에 지는 것, 한발 물러난 자세로 "나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와 같은 태도를 보이거나 아예 싸움을 피하는 것이 그나마 자존심을 지키는 길이다. 그것이 '쿨한 모습'으로 받아들여진다.
진정으로 새로운 주장이나 사상이 없는 상태에서 조롱과 비아냥거림, 의미 없는 장난이 이 세대의 트레이드마크가 된다. (<표백>, 197쪽)



언뜻 신문 기사 같기도, 칼럼 같기도 한 이런 형식의 자살 선언문은 <표백>을 흥미롭게 하는 포인트다. 자칫 소설이 아니게 느껴질 수 있는 선언문들은, 등장인물들의 입을 빌려 그들의 철학을 세밀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표백>을 역으로 더 '소설'스럽게 만든다. 좀 더 완벽한 허구 말이다.



특히 위 인용구에 깊이 공감했다. 충분히 불만을 갖고 이야기해볼 수 있는 사안에 왜 이렇게 덤덤하지? 무엇을 믿고 쿨하지? 의아한 순간이 많았는데 그런 마음이었구나 싶다. '어차피'라는 단어를 움켜쥐고 손해 보지 않으려고, 촌스러워 보이지 않으려고 그랬던 거였어. 등장인물이 고작 개인으로서 성취할 수 있는 궁극의 욕구로서 섹스에 몰두했듯, 즐겁게 생활하는 개인에만 최선을 다하는 거였어. 새삼스럽게 되짚는다.



시대와 함께하는 소설이 좋은 문학이라고 단언할 순 없다. 당연하다. 그러나 언제나 좋아보이는 건 그쪽이다. 취향이기도 하거니와 그쪽의 작품은 언제 읽어도 유효하기 때문이다. 시대를 지나온 작품은 시간에 글이 풍화되지 않는다. 13년 전 <표백>이 출간됐다. 2024년에 읽은 이 작품의 검은 활자가 어쩐지 더 또렷하게 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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