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가님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부쳐
대학교 때 친구들 사이에선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는 것이 '힙'이었다. 문학적으로든, 여성주의적으로든, <채식주의자>를 읽지 않고는 감수성 넘치는 척을 하기 힘들었다. 책 좀 읽어? 여성주의 좀 알아? 그럼 당연히 읽었겠지, 안 읽었으면 당장 봐! 같은 느낌으로. 현학적이고 재수 없지만 아무튼. 우리는 감수성이란 수수료를 걸고 다단계 하듯 서로에게 이 책을 권했다. 무엇이 폭력적인지, 어떤 부분이 아름다운지 침 튀기며 주석을 달곤 했다.
많은 것에 무지했던 청춘들은 불안을 달래려는 듯 서로에 대해 아무렇게나 판단하는 걸 좋아했다. 일종의 MBTI 테스트였다. 술 마시며 즐겨 나눴던 질문 중 하나는 <채식주의자>에 실린 중편들 중 어떤 것에 가장 끌리는지였다.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불꽃'. 누구도 다치길 바라지 않지만 모두의 상처를 드러내는 이야기. 다른 관점과 결을 가진 세 개의 중편들로 각자의 성향을 끼워 맞춰 해석하곤 했다. 영혜, 형부, 인혜 중 누구의 이야기에 귀를 더 기울이는지를 듣다 보면 친구가 어떤 사람인지도 읽히는 것 같았다. 너를 이해하고, 나를 이해받고 싶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취업, 주식 같은 소재가 아니라 왜 이런 이야기만 밤을 새워가며 했을까. 가끔 농담반 진담반으로 한탄하곤 했다. 이해받지 못하는 감수성을 갈고닦아 버린 것에 대하여. 세계의 진실과 도저한 아름다움을 알아버린 이가 되어 그렇지 않은 이 세상에선 외로워하고, 아파할 줄 밖에 모른다고. "다시는 무너지기 전의 상태로 되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아서. ‘쓸모’ 없는 것들에 진심이었던 순간이 지긋지긋하다고 괜히 싫증도 냈다.
우리의 스물로부터 시간이 꽤나 흘러 오늘이 됐다. 여성주의적 감수성은 어느 정도 상식이 되었고, 오늘 밤엔 많은 이들이 한강 작가님과 그의 작품을 이야기하고 있다. 상상이나 했을까. 스물의 우리에게, 그렇게 틀린 이야기는 아니니 하던 대화를 마저 하라고 해주고 싶다. 그때의 우린 더는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