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 3박 4일 둘째 날
친구의 권유로 오사카성(大阪城)에 왔다.
임진외란을 일으킨 豊臣秀吉(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만든 성이다.
그는 천하통일의 근거지로 오사카성을 지었다.
15년 세월 동안 공을 들여 축성한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요새(要塞)다.
육지에 섬(島)을 만든 것이다. 그 섬 안에 또 섬이 있다.
오사카성은 20여 미터 높이의 가파른 성벽과 내 외곽의 2중 해자(垓子:인공하천)를 만들어, 유사시 적군(敵軍)의 공격을 방어하는 인공 장애물이다.
그리고 높은 누각을 지어 적의 침입을 빠르게 알아낼 수 있도록 했다.
조선침략(임진외란)에 실패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자 그의 아들 히데요리(羽柴秀頼)가 후계자가 되어 이 성에 머물고 있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는 히데요리(羽柴秀頼)에게 성을 비우고 나가라 요구한다. 그러나 히데요리는 이를 거부하면서 전쟁이 시작된다.
이 성이 난공불락(難攻不落) 임을 잘 아는 도쿠가와(徳川家康)는 1614년 12월.
20만 대군으로 성을 포위하여 고립시킨 다음, 네덜란드에서 들여온 대포로 포격(砲擊)을 가하며, 성 안에 있는 히데요리에게 겁을 준다. 그런 다음 화친(和親)을 한다.
해자(垓子)와 성벽을 없애면 군대를 철수하겠다는 것이 화친 조건이다.
히데요리는 이 조건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해자(垓子) 매몰작업이 시작되자, 도쿠가와 군(軍)도 철수한다.
1615년 5월 해자(垓子)가 다 메워진 다음, 도쿠가와(徳川家康)는 다시 군사를 끌고 쳐들어온다.
해자가 없는 오사카성은 더 이상 난공불락(難攻不落)이 아니었다.
도요토미 아들 히데요리는 자결을 하고, 천수각(天守閣)은 불타버린다. 이렇게 도요토미(豊臣) 가문은 종말을 맞는다.
이것이 일본 역사에서 등장하는 오사카성 겨울 전투, 여름 전투다.
도요토미(豊臣秀吉) 가문의 멸망은 어찌 보면 임진외란으로 피해를 본 조선사람들을 대신해 도쿠가와(徳川家康)가 복수를 해준 셈이다.
도쿠가와(徳川家康)는 최고 권력자가 되고 에도시대가 개막된다.
그 후 성은 도쿠가와 가문에서 복원하지만 얼마 안 되어 벼락을 맞고 불타버린다.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조선침략을 벌한 것인가, 하늘도 이 오사카성을 저주하는 것 같다..
그리고 2차 대전 때 미군의 공습으로 폐허가 된다.
안쪽 해자(垓子)를 건너자 또 하나의 문(桜門)이 기다린다. 안쪽 해자(垓子)에 물은 없고 웅덩이에 풀만 무성하다. 전에 메워진 해자를 그대로 둔 것 같다.
드디어 천수각(天守閣)의 위용(偉容)이 나타난다.
오전 9시가 조금 넘은 이른 시각인데, 비를 맞으며 중국 관광객들이 성을 가득 메웠다. 마치 오사카성을 점령한 도쿠가와(徳川家康) 군대들 같다.
천수각 안으로 입장하려 했으나 관광객이 너무 많아 포기를 했다.
천수각은 지상 55m, 5층 건물이다. 최상층은 전망대로 사용하고 나머지는 각종 전시물이 있다고 한다. 입장료는 600엔이다.
비가 굵어지기 시작한다. 비를 피해 부속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건물 1~2층에 상점과 식당들이 있다. 말차(抹茶) 아이스크림 맛을 보았다. 비가 멈추기를 기다렸지만 쉽게 잦아들 비가 아니다.
비를 맞으며 버스정류장으로 나와 우메다역으로 돌아왔다.
시간은 어느덧 점심시간.
지하 식당가에서 스테이크 백반으로 점심을 했다. 중년부부가 하는 허술한 식당인데 맛이 있다. 기린 캔맥주도 한잔 했다.
상가 내 커피숍으로 들어오니 흡사 옛날 다방 같은 분위기다. 자리를 잡고 앉자, 종업원이 재떨이부터 가져온다. 그리고 주문을 받는다. 주변엔 모두 담배들을 피운다. 일본에서는 길거리 금연은 엄격한데, 실내 흡연은 관대하다.
차 한 잔 하고 가와라마치(河原町)로 가는 특급열차에 올랐다.
다시 찾은 스시노 무사시(寿しのむさ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