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얼떨결정 Aug 03. 2020

포기는 왜 용기가 아닐까?

계속 노력하는 것과 그만두는 것 중에 더 쉬운 것

 2010년부터 2019년까지 꾸준히 외길이었다. 관두기로 했다.


'연구자가 돼야지. 사회에 대한 공부를 해야지. 갑자기 죽어버리는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죽는 게 아니라는 걸, 그건 구조적이고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거라고 증명해야지.' 하던 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면 다른 사람들이 하겠지'하고 변했다.


 특별히 재미있는 거 없는 인생에 유일하게 오랜 기간 재미있었던 논문 읽기가 재미가 없어졌다.




 계획한 대로 살아오기 위해서 애썼다. 대학 때 만든 엑셀 표에는 2024년까지의 계획이 적혀있다. 휴대폰 배경화면을 차지한 인생 계획표는 지금까지 변한 적 없다. 졸업하기, 대학원 가기, 유학 가기, 학위 따기.


 뭐가 되고 싶냐고 물으면 "연구원이나, 시간 강사나, 교수가 되겠지."라고 말했다. 이 세 가지는 너무 다른 길이다. 하나의 길목에 있지만 전혀 다른 종류의 근무환경이 제공된다. 노력하는 방식은 동일하지만 결과는 다르다. 하는 일은 같지만 근무환경과 평판과 주어지는 보상은 다르다. 성과가 있고 노력하고 운이 좋다면 더 좋은 자리를 가질 것이다. 대체로 대부분의 직업이 그렇다.


 용감하고, 담담하게, 확신에 차 있듯이 말했었다. "그래도 나는 행복할 거야." 그 말은 시간강사로 소위 보따리 장사를 하더라도 괜찮다는 말이었다. 나는 자기 합리화에는 재능이 있는 편이었다. 머리를 잘 굴려서 스스로를 속이는 능력을 지닌 건 인생이 힘겹게 느껴질 때 소중한 자산이었고, 누가 봐도 나는 확신에 가득 찬 인간처럼 보였다.


"그래도 나는 행복할 거야"하고 말하면, 사람들은 나를 응원했고 한편으로 부러워했다. 불안하지 않아 보이는 것을 부러워했고, 그렇게 생각하고 계속할 수 있는 것, 그걸 사람들 앞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을 부러워했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어떤 순간은 진심이었고, 다른 때는 오만이었고, 가끔은 스스로에게 하는 명령, 그리고 주문이었다.  




 강사법(개정 고등교육 법) 개정안이 4차례 유예되다가 8년 만에 시행되는 것을 목격했다. 처우가 나아지고 자리는 사라진다. 주 3시간 강의를 위한 두꺼운 이력들이 담긴 서류를 날랐다. 프로젝트 단위로 쏟아지는 석사 위촉직 자리와 계약직 연구원 자리를 봤다. 예전에는 상관없다고 여겼던 것들이 곤란해졌다.


 시간 관리 앱에 순간을 기록했다. 왜 하루는 24시간인데, 6시간 공부하고, 6시간 일하고, 6시간 자고, 나머지 6시간 동안 씻고 먹고 움직이고 빨래하고 운동하고 가 안되지? 친구는 공부 오래 하면 사람이 멍청해지는 거냐고 물었다. 돈 받고 하는 프로젝트에 할애하는 시간에 비해 내 연구 주제에 할애하는 시간이 적었다. 유학을 가겠다고 영어공부를 하는데, 열심히 하는 법을 까먹은 사람처럼 굴었다. 하고 싶은 일을 위해서 해야 하는 것을 하는 것은 당연한데 왜 관두고 싶지?


 정부지원을 받던 전세 계약이 끝났다. 방을 구할 수 없어서, 구한다 한들 학교를 다니면서 버는 생활비로 월세는 못 낼 것 같아서 친구 집에 덥석 들어갔다. 짐을 많이 버려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발 디딜 틈이 없다.  


 미래도 주거도 고용상태도 불안정하니 정신도 불안했다. 매일 울다가 갑자기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사실 3개월 내내 고민했다. 그리고 그만두기로 했다. 사실은 그만두기로 한 건 아니고 우선 멈추기로 했다. 왜 멈추는지에 대해서 고민해봤더니 변한 게 없었다. 공부하는 길은 원래 불확실하고, 우리 집은 원래 돈이 없고. 나는 원래 이 길을 혼자 가고 있었고, 원래 학벌은 모자랐고, 영어도 원래 국내파였고, 원래 주거도 불안정했다. 나이 탓일까?




"전공을 잘못 택했거나, 시대를 잘못 타고났거나."


 내가 잘못한 게 뭔지 고민하니 저런 대답을 들었다. 참고로 돈이 되는 것만 대접받는 시대가 된 게 아니다. 내가 공부하는 것이 돈이 되지 않는 시대가 된 거지. 예전에도 돈이 되지 않는 것은 대체로 가치가 없었다.


 나는 내가 잘못한 게 조금 더 열심히 하지 않은 거라고 생각했다. 불확실함을 이길 수 있을 때, 자기가 벌어먹고 1인분의 몫을 하는 사회인이 된다는 게 뭔지 모를 때, 주변 사람들이 모두 불확실할 때, 주변 사람들이 아무도 결혼이나 취직 같은 것들을 염려하지 않을 때. 그때 더 열심히 했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라, 해라, 꿈을 이뤄라" 같은 말들에 진절머리 치면서도 내가 오랜 기간 바랐던 것이 하나였다는 게 쑥스럽다. '반드시 그거 여야만 하는 것' 같은 게 있는 건 행운이라는 생각을 종종 했다. 소위 말해서 꿈이 있는 사람들이 신기했다. '내가 바라는 것이 뭐 그 정도로 대단한 꿈같은 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도 내가 나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언젠가 만약 포기할 때를 대비해서 미리 스스로에게 살짝 말해두는 거다. '네가 정말로 원하는, 이게 아니면 안 되는 그런 건 아니니 힘들면 그만두렴.'




"용감하네요."


 누군가는 내가 관두기로 했다고 하니 용감하다고 말했다. 오랜 시간 동안 바라던 것을 놓는 건 용감한 거라고. 무슨 뜻인지 이해는 되었지만 마음이 편안해지지는 않았다. 나는 머리로 이해되면서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우리는 왜 포기는 패배의 다른 말이며 용기의 반대라고 배웠을까. 포기하는 건 왜 자신이 없어서 혹은 용기가 없어서, 능력이 없어서, 의지가 없어서인 걸까.


 그냥 이제는 원하는 게 변한 것뿐이다. 불확실함을 조금 덜 느껴도 되는 삶. 2년 뒤에 내가 있을 나라를 예상할 수 있고, 모아둔 돈을 계산할 수 있는 삶. 명절에 부모에게 줄 용돈을 오래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삶.




계속 노력하는 것과 그만두는 것 중에 어느 게 더 쉬울까?

친구는 그만두는 것조차 그만두고 싶다고 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가진 문제 중 가장 해결하기 쉬운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