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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얼떨결정 Nov 14. 2024

익숙한 고통에서 도망치기

낯가리는 행복

"매일 엉망으로 살고 싶은 마음과 제대로 살고 싶은 마음이 충돌한다"


네이버에서 '우리가 바라는 우리'라는 웹툰을 그렸던 잇선 작가가가 텀블벅에서 판매했던 만화 '이상한 다이어리' 표지에 적혀있던 말이다. 미안하지만 작가가 적당히 조금만 행복해지길, 그래서 내 취향에 맞는 유쾌하고 귀엽지만 우울한 분위기를 계속 작품에 담아주길 바랐다. 내가 변하지 않는 걸 보니 좋아하는 작가가 굳이 조금만 행복하길 바랐던 건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좀 더 어릴 때 쓰던 지나간 일기들을 보면 늘 더 제대로 살기 위해서 다짐하는 말로 끝난다. 앞으로는 이렇게 하고, 다음에는 저렇게 하고 이런 식의 다짐들. 하루가 뿌듯하거나 혹은 만족스럽게 끝나는 날은 많지 않았다. 직장인이 되고 나서는 더 이상 일기를 자주 쓰지 않는다. 일기를 쓰지 않아도 하루가 뿌듯하거나 만족스럽게 끝나는 날이 많지 않다는 걸 매일 알 수 있다.


매일 기록하지 않으면 점점 더 행복과는 멀어진다. 감정이 격해질 때 기록하며, 나라는 사람은 행복과 긍정적인 정서보다는 그 외 나머지 것들을 더 잦고 예민하게 느낀다. 행복은 무감하여 기록되지 않은 채 사라진다.


기질인지 자라온 환경 탓인지, 그 무엇이 되었든 이 나이까지 내가 나를 못 고쳐먹은 탓인지 생각한다. 마지막 선택지만이 앞으로 다르게 느끼며 살아갈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 마지막 해석을 스스로 택한다. 나는 스스로를 고치는데 반복적으로 실패하고 있다. 사실 앞선 세 가지 중 무엇이든 앞으로를 결정짓지는 않지만, 그중에서도 나는 스스로를 비난하는 쪽을 택해왔다.


예전에는 이런저런 것들을 하면 나아지리라 생각했다. 운동이라든가 상담이라든가, 멀쩡한 직장, 오르는 연봉, 사회의 인정, 소소한 취미, 감사일기 쓰기 같은 것, 사랑하는 사람과의 약속 같은 것들. 10년쯤 지났다. 많은 것들이 이제 안정적인데, 여전히 쉽게 불안함에 잡아 먹힌다.


다정한 글들을 찾아 읽는다. 효과적이진 않았다. 행복한 순간에 곧 찾아올지도 모르는 불행을 떠올리며 행복을 만끽하지 못하는 사람들처럼 갇혀있다. 왜 나는 내 정서를 선택할 수 없는가. 감정을 느끼고 인정하고 받아들여줘야, 넘어갈 수 있다고 한다. 결국 내가 ‘나는 슬프구나, 우울하구나, 그만두고 싶구나’ 해주며 ‘그래 그럴 수 있지’해주지 않고, 스스로에게 ‘넌 왜 그러니 도대체’라고 되물어서 지금까지 이렇단 뜻이다.


익숙한 고통은 쉽다. 아는 것이다. 괴롭지만 평화롭다. 괴롭기는 한가? 아마도 그럴 것이다. 다른 방식의 삶을 살아본 적이 없기에 그곳으로 도망치지 못하고 있다. 어디로든 가고 싶은데 어디로 갈지를 모른다. 근데 정말 어디로든 가고 싶은가?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에 가깝다. 이 생각은 내 생각이 맞을까? 사회가 요구하는 게 너무 많다. 야근도 하고, 일에서 자아도 찾고, 사랑도 하고, 외모도 관리하고, 책도 읽고, 취미도 즐기고, 재테크도 하고, 부모님도 챙기고, 긍정적으로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꾸려나가기. 사회가 요구하는 게 맞나? 그저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알 수 없다. 나는 도망치고 싶은 걸까? 무엇으로부터?


멀쩡하게 직장을 다니면서 일본의 사토리 세대의 삶에 대해 검색한다. 그러다가 휴대폰을 닫고, 익숙한 고통으로부터 도망칠 준비를 한다. 음식을 먹고, 씻고, 방 정리를 하고, 생각 없이 보며 웃을 수 있는 걸 보며 낄낄거리다가, 잠을 자고. 시간이 지나면 운동도 슬쩍 넣고, 그림도 그리고, 글도 더 자주 쓰겠지. 더 잘 도망치기 위해 더 구체적인 수준으로 시선을 돌린다. 욕조에서 거품 목욕하기. 그러다 불현듯 욕조 있는 집에 살아본 적이 없고, 지금도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이쯤 되면 어쩔 수 없이 비장의 무기를 꺼낸다. 엄청 큰소리로 크게 말한다. 무슨 말이든 상관없고 방 안에 있는 모두가, 아니 방 밖에 있는 사람도 들릴만큼 크게 외친다. 일상적인 이야기든 다짐이든 욕설이 아닌 것으로 크게 소리 내서 말하면, 어이가 없어서 피식거리다가, 목소리를 내는 힘이 에너지가 되어 잠깐 도망칠 수 있다.


자주 만나야 익숙해질 텐데, 행복이란 건 추상적이라서 자주 만나기 쉽지 않다. 그럴 땐 행복의 정의를 새롭게 내린다. 오늘의 행복은 누워서 뒹굴거리는 것으로 해. 지금의 행복은 아이스크림 먹는 것으로 해. 이것조차 실패하면 미안하지만 아직까진 데면데면한 사이인 걸로 친다. 낯을 많이 가리는 게 나쁜 건 아니니까. 언젠가 익숙해지겠지 하고 그저 순간들이 지나가길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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