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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얼떨결정 May 31. 2020

익숙한 고통이 주는 편안함

언제 도망칠 지 고민 중

"만약 내일 죽으면 뭘 할래?"

"글쎄다. 아마도 코딩?"

"왜?"

"코드는 남으니까. 그럼 넌 뭐할 건데?"

"내일 죽는 게 100% 확실하면, 아마 오늘 죽겠지."



"만약 딱 한명의 인간을 죽일 수 있다면 누구로 할래?"

"딱 한 명이어야해?"

"응. 딱 한명."

"나 자신. 뭘 어렵게 생각해."



"너 만약 내가 아파서 일도 못하고 병원에 누워만 있게 되서 돈도 못벌면 어떻게 할래?"

"경제적으로 책임져주고 그런 건 못해주고. 그냥 너 돈 들고 외국 나가서 안락사 신청할 때 따라가줄게."



"그래도 정신이나 몸 둘 중 하나는 건강해야지."

"원래 정신이 안건강하면 몸이 안건강하고, 몸이 안건강하면 정신이 건강하기 어려워."

"아니 그래도"

나는 친구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원래 건강했던 사람도 언제 아니게 될 지 몰라."



"너로 인해서 그 사람이 밝아지고, 행복해지고 너도 그렇게 긍정적인 영향을 받으면 좋잖아."

"글쎄, 그건 걔가 원하면 그렇게 되겠지.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아니야. 각자의 삶이지. 각자의 삶이 서로 감당안되면 그만두는 거고."

"그렇게 생각하면 너무 불안하지 않아? 불안정하잖아."

"그렇게 생각 안해도 원래 관계는 불안정해."


2020년 어느 날의 대화들



주변 사람들로부터 정신과에 가보는 게 어떻냐는 말을 들었다. 누군가는 진지하게 말했고 누구는 농담 반, 진담 반이었고, 누구는 자기가 가보니 좋더라는 식이였다. 나는 그러려니 하며 그냥 하루하루를 보냈다.


회사에서 일을 잘 못해서 혼이 났다. 머리 속에서 망상이 시작됬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크게 싸운 다거나 아니면 이 일로 인해서 회사에서 나가게 된다거나 뭐 그런 류의 상상이었다. 나는 상상을 자주 하는 편은 아니었는데, 어떤 상상이 시작되면 그걸 쉽게 끊어내고 현실에 집중하지는 못했다.

 

상상의 내용은 주로 현실에서 벌어질 가능성은 있는 일이지만(달리 말해 SF나 판타지는 아니지만), 대체로 상식적으로는 잘 벌어지지 않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리고 상상을 하면서 내가 하는 일은 어떤 대답을 할지, 어떤 행동을 할지를 시뮬레이션 하는 것이었다. 그다지 의미있는 일이 아닌 걸 알아서 상상을 그만하고 싶은데도 강박적으로 이어진다. 그 강박을 자각하면서 상상이 계속되는 건 그다지 유쾌하지 않다.


상상을 끊어내지 못하고 상상을 하는 나와 그걸 지겨워하는 나. 상상을 하는 나를 지켜보면서 스스로 확실히 정신과에 가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랜만에 하는 상상이다보니 '아직까지 이러다니 확실히 가야겠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왜 정신과에 안갔지? 왜 지금도 그다지 내키지 않지?'하는 고민을 시작했다.


귀찮거나 게으르거나 보험에 가입해야해서, 부모님이 걱정할까봐, 다음에 뭔가 일이나 관계에서 문제가 될까봐, 사람들의 편견을 마주하기 싫어서, 내 스스로 내가 도움이 필요하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뭐 그런 보편적인 이유들을 떠올리다가 정말로 정신과에 가는 게 필요하다는 증거나 다름 없는 생각이 떠올랐다.


'언젠가 스스로 그만둬야하는데, 정신과에 가서 치료를 받으면 그런 생각이 사라지고 계속 살아가게 되는 거 아닐까? 나는 친한 친구들이 의지할 다른 사람들이 생기고, 부모님은 이미 떠나서 크게 걱정할 사람이 남지 않았을 때를 막연히 기대하면서 살았었는데.'




어디서 본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심리학과 수업에서 들었던 말인 것 같다. 상담이나 치료를 저항하고 계속해서 원래의 안좋은 상황으로 돌아가려는 내담자를 설명할 때 사용된 표현 같다.


사람은 익숙한 고통을 편안하게 여긴다.

내가 그런 상태일지도 모른다. 심지어 익숙해진 고통은 그렇게 고통스럽지도 않다. 무뎌지는 것이다. 비교할 고통스럽지 않은 상태가 없다보니 고통인지 아닌지 가늠하기가 어렵고, 오히려 지금이 평소이며 고통스럽지 않은 순간은 특별히 행복하거나 즐거웠던 순간으로 기억된다.


나는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라는 말을 즐겨 썼는데, 저 말을 좋아해서라기 보다는 '하지만, 어차피 여기도 낙원은 아니니 도망쳐도 전혀 상관 없지'라고 이어서 말하는 걸 좋아했다.  


"지금이 내가 가진 편안함에서 도망쳐야하는 때가 아닐까?"


늘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며 사는 건 아니다. 사람을 그렇게 불신하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늘 우울한 것도 아니고. 사실 스스로 기분을 '우울하다'라고 느끼는 때는 거의 없다. 재미가 없거나, 무기력하거나, 귀찮거나에 가깝다. 잘 웃고, 일상생활도 잘하고, 심지어 열심히 사는데, 가끔 살기가 피곤하거나 귀찮다고 느끼는 것이다.


아니 정말로 나처럼 생각하거나 대답하는 게 일반적이지는 않다고?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나처럼 생각을 안한다고? 믿기지가 않는다. 끼리끼리라 그런지 근처에는 종종 있다. 사실 대부분 가끔씩은 저런 생각을 하는 데 말을 안하는 거라는 생각이 든다. 잘 모르겠다. 답을 알 때까지는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 같다.


언젠가 현 상태에서 벗어나긴 벗어나야한다. 차차 벗어나는 중이라고 여겼지만 그렇지 않다고 느껴질 때도 잦다. 다만 벗어나고 싶은지 아닌지는 애매하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고, 여기도 낙원이 아니라면, 여기든 도망치든 무슨 상관이냐 싶은 마음. 도망친 곳에 낙원이 없다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만든 게 아니므로, 말장난이고 궤변일 뿐이다. 나는 왜 망설이는 걸까?



내가 자살 유가족이기 때문에 죽는 것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걸까? 이런 고민을 종종하곤 했다. 근처 사람들을 보면 특별히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그냥 자주 이야기되는 우울증에 가까운 것 같다. 자가 진단은 위험한 거라서 궁금하다면 병원에 가보는 게 좋다.


가끔 엄마가 죽는 순간에 선택을 후회했을지 아닐지 궁금하다. 나는 후회하지 않았길 바란다. 엄마가 선택한 것의 댓가는 그다지 가볍지 않은 것 같아서 선택에 후회를 했다면 안타까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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