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얼떨결정 May 31. 2020

죽고 싶은 게 아니라 그만 살고 싶은 것

나는 아마 자살은 안 할 거야

극심한 우울증 환자는 의지가 있으면 운동보다 자살을 한다.


검증된 말은 당연히 아니고, 내가 친구들이나 애인이랑 가끔 꺼내는 말. 어디서 본 말인지는 기억 안난다.


자살이라는 건 정말 적극적인 의사표현이다. 비록 극심한 우울증의 결과물이겠지만, 이 상태를 더이상 지속하고 싶지 않다는 강렬한 의지 같은 게 숨어 있는 것 같다. 때로는 자신의 상태를 알리는 세상과의 소통 방식 같기도 하다. 물론 소통은 일방향적이며, 그 일방향의 외침에 대한 답변은 결코 들을 수 없다.

 



내게는 죽지 않아야만 하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사람들. 근처의 사람들. 내가 갑작스럽게 떠나고 나면 내가 겪었던 감정과 유사한 것들을 마음 한켠에 남겨둬야할 사람들. 사람들이 인생에 그렇게 큰 의미를 가진 적 없다고 매번 주장하면서도 늘 마음 한켠에는 남겨질 사람들이 걱정되었다. 어차피 죽고 나면 남겨진 사람들이 어떨지 알 수 조차 없을 텐데 무슨 상관이냐 싶다가도, 나는 분명 남겨질 사람들이 어떤 종류의 감정을 겪게 될지 알았다. 내가 겪었던 경험의 일부분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겪겠지.


자살유가족이 된다는 건 이런 점에서 나름의 장점이 있다. 물론 자살유가족들은 일반 사람에 비해 자살할 확률이 4배쯤 높지만, 적어도 몇몇은 나처럼 죽고 나면 남은 사람들이 고통스럽겠군하고 조금 더 삶을 지속하는 방향을 고려해 볼 거다.  


가족들도 안됬다.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할머니가 마음에 걸리고 아빠가 마음에 걸렸다.


막연히 그런 것도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어떤 사람이 될지 궁금해하는 마음. 내가 가진 가능성은 뭘까, 내가 어떤 종류의 인간이 될 수 있을까, 내가 해낼 수 있는 건 어디까지일까 하는 야망의 냄새가 풍기는 그런 종류의 바람.


심지어 난 해보고싶은 것도 많은 인간이다. 오토바이도 타보고 싶고, 패러글라이딩도 해봐야하고, 사막 여행도 가야하고, 서핑도 하고, 보드도 타고, 인도 여행에 가서 장례식과 빨래터가 50m 거리에 있는 강도 보고 싶고, 삼천만원짜리 시계도 가지고 싶다. 헬스도 열심히 하고. 외국에 나가서 헐벗고 돌아다니는 것도 해야하고. 미술 작품도 보러가야하고.


문제가 있다면 그 모든 욕망이 무기력의 크기보다 작다. 사는 건 너무 귀찮은 일이다.

 



죽는 걸 두려워하는 마음이란 뭘까?


내가 만약 어느 날 갑자기 스스로 죽는 다면, 먼 거리의 누군가들은 '아, 걔가 그랬구나. 그럴 줄 알았어.' 하거나, '아, 걔가 그랬다고? 그럴 줄 몰랐어.' 하겠지. 하지만 분명 누군가는 스스로를 탓할 거다. 그 때 그렇게 말하지 말 걸, 그 때 병원에 억지로라도 데리고 갈 걸. 그 때 같이 어디 갈 걸 뭐 그런 종류의 생각들을 하겠지. 그리고 조금 더 가깝게 느낄 거다. 죽는다는 것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 옅어질 거다.


자살을 할 때는 스트레스와 우울감 외에 자살이 가능해야한다는 조건이 필수적으로 필요하다. 자살을 할 도구가 필요하고, 심리적으로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적어야 한다.


나는 특별히 죽는 게 무섭다고 느낀 적이 없다. 아마 죽을 위기에 처해본 적이 없어서 그렇겠지.


번지점프를 처음 하던 때였다. 높이가 높아서 다리가 떨리는 게 느껴졌다. 그런데 하나, 둘, 셋, 점프에 맞추어서 뛰는 건 너무 쉬웠다. 안 뛰면 강사가 민다던데. 실제로 미는 지 안 미는 지 궁금했지만, 그걸 기다리는 것보다 타이밍 맞게 뛰는 게 더 끌렸다.


죽는 건 왜 무서울까? 아픈 건 무섭다. 그런데 아픈 거랑 죽는 걸 무서워 하는 건 다르다. 아무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는 약 같은 게 있어도, 누군가는 죽는 게 무서워서 그걸 먹지 못할 거다. 무가 되는 것, 자신이 해 온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것,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신체적인 고통이 주는 두려움과는 다른 종류의 두려움이다.

 



'그만 살고 싶다'와 '죽고 싶다'는 내게는 너무 다른 말이다. 의사들이 보기에는 같을 지라도.


애인이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를 끊을 수 없다는 소리를 정신과 의사에게 들었다고 했다. 애인은 조금 씁쓸해 했다. 나는 '20세기면 죽었을텐데, 21세기라서 살아 있네. 현대의학이 참 좋아'하고 무심한 척 답했다. 애인은 '그러게 긍정적이네'하고 웃었다.


스스로 자기 의지로 정신과에 찾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어떻게 안 죽고 그걸 찾아갈 생각을 했지? 그것만으로 엄청 의지가 투철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죽고 싶다고 느낀 적은 별로 없다. 엄마가 죽은 이후에는 사는 게 늘 귀찮았다. 마음을 다해서 좋아했던, 달리 말해 내가 지나치게 의존했던 누군가와 헤어졌을 때는 사는 게 무서워졌다. 사는 게 의미가 없게 느껴지기도했다. 감정적으로 오락가락하던 그 때는 간헐적으로 죽고 싶다는 생각을 가끔 했지만 잦지 않았다. 다만 그 가끔이 강렬했지.


좋은 일이 있든, 슬픈 일이 있든 늘 사는 건 귀찮게 여겨졌다. 사는 게 귀찮은 것치고는 너무 아등바등해야해서 그만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그렇게 바라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해야하나 하는 생각.


'그만 살고 싶다'와 '죽고 싶다'는 표현에서부터 차이가 난다. 그만 살고 싶다는 건 수동적이다. 지금 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멈춰지기를 바라는 것과 모든 것들을 스스로 멈추고 싶은 건 다르다.




스스로에게 너그러운 사람만이 타인에게도 너그러울 수 있다.


계속해서 가라앉아 있는 게 느껴진다. 귀찮아서 죽을 생각도 안드는 지경인가 혹은 사는 게 여유로워져서 생각할 틈이 생겼나 싶다.


나는 스스로에게 너그럽지 않은 사람이 타인에게 너그러울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주로 겉으로 드러나는 내 모습은 타인에게 너그럽지만, 내 스스로를 내가 대하는 방식을 보면 나는 타인에게도 엄격하고 전혀 너그럽지 않고, 가끔은 가혹한 인간일 거다.


"우울하거나, 힘들거나, 살기가 귀찮거나, 죽고싶다니 사는 게 여유로운가보네. 그 시간에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지."


해결할 방법을 찾으려고 애쓰는 인간들은 늘 중요한 것을 놓친다. 감정을 달래거나 힘든 상태를 알아주고 위로해주는 건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군다. 왜 그런 상태가 되었는지를 고민하고 이유를 찾았으면 해결할 방법을 찾는다. 이유를 못찾아도 해결할 방법을 찾는데 몰두한다. 문제 해결에 집중하는 인간들은 스스로를 돌보지 못해서 정신적으로 황폐화되기 쉬운 것 같다.


그리고 이 모든 걸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어떻게 이 상태를 해결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상태가 안좋은 걸 느껴서 무엇이든 하기로 했다.


안좋은 상태가 지속되고 있는 것 같다. 한달까지는 아니고, 요즘은 일기를 안써서 모르겠지만 2주는 된 것 같다. 그러니 해결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죽는 거 빼고는 아무거나 해도 돼.


예전에 정말 상태가 안좋을 때면 죽는 거 빼고 아무거나 다 해도 괜찮다는 식으로 굴었다. 상담 선생님은 나한테 클럽 가서 원나잇하냐고 물었고, 나는 그런 적은 없다고 했더니 다행이라고 하셨다. 자기파괴적으로 굴게 되면 안된다나. 여하간 나는 딱히 크게 문제 될 만한 일은 아니었고, 뭐 전에 만나던 사람한테 연락하기 정도 했던 것 같다. 물론 전에 만나던 사람 입장에서야 문제였겠지만. 이번에는 좀 더 생산적인 걸로 해보기로 한다.


1. 운동 : 경험에 따르면 거의 이틀에 한번꼴로 헬스 같은 고강도 운동을 하는 건 큰 도움이 된다. 하지만 혼자서 하기에는 의지가 부족하다. 경험 상 돈을 들여서 PT 같은 걸 받으면 좋다. 주 1~2회는 가기 귀찮다는 마음이 들어서 힘들고, 거의 매일 간다는 마음으로 힘들 때 빼먹어서 주 4~5일 쯤 가면 일상이 달라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안타깝지만 지금은 그렇게 할 수 없는 이유가 많다. PT 할 만한 돈까지는 없고, 코로나19로 헬스장이 여의치 않고, 예측할 수 없는 야근이 많아 운동하는 날을 미리 정하기가 어렵다. 핑계다. 그러니까 나는 죽을 의지도 없지만 지금 운동을 할만한 의지도 없는 상태다.


2. 독서 : 책을 읽는 건 늘 옳다. 하지만 책을 꺼내는 것보다 휴대폰을 꺼내는 게 훨씬 쉽다. 그리고 책 내용이 마음에 안들면 상태가 악화되기 쉽다. 그리고 우울한 정서가 풍기는 책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 확실한 건 위로에 도움이 되는 힐링류의 책은 읽지를 못한다.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3. 음악 : 음악도 우울한 거 좋아한다. 패스하자.  


4. 정신과 방문 : 애인이 어딜 다니는지 알아냈다. 예약만하고 들리면 500개 가까이 되는 MMPI 검사지와 문장완성 검사 같은 걸 하게 될테고, 약을 처방할 테고, 상담을 받겠지. 그리고 나는 이전에 내가 했던 검사 결과와 문장완성 검사와의 차이 같은 걸 집에서 비교하겠지. 그리고 약의 도움을 받아 꽤 괜찮은 상태로 일상을 지속할 수 있게 된다. 애인이 보험으로 할건지 비보험으로 할건지 물었다. 비보험이라 대답했다. 아직 가고 싶지 않은가보다.


5. 상담 : 몇 번 받아보았으니 그만 받기로 하자.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지치는 일이다.  


6. 미뤄왔던 로망 실현 : 서핑, 스케이트 보드, 오토바이, 패러글라이딩, 사막 여행, 인도여행 중 하나를 한다. 여행은 돈 없으니 빼는 걸로 하고, 3000만원 짜리 시계도 불가능하니 뺀다. 알아보면서 늑장을 부린지 일주일이 지났다. 원래 뭔가 하려고 할 때는 '그냥' 하는 게 좋다. 생각하면 안하게 되니까. 6월 첫 주말에 서핑을 하러 가기로 했다. 오늘 예약했고 그냥 오는 주말에 가면 된다. 스케이트 보드를 배우기로 했다.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면 다음 주에 예약하고, 그냥 가면 된다.


7. 속는 셈 돈 쓰기 : 마인딩이라는 온라인 심리 관련 앱이 있다. 서비스 출시 때 부터 알던 앱인데, 그다지 신뢰되지도 않았다. 게다가 나는 사람들 말을 잘 듣는 편도 아니고, 심리학과에 대한 신뢰도도 낮다. 정신과까지 고려하고 나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신과에 가는 것과 집에서 폰 보는 것 중에 무엇이 더 쉬운가. 폰 보는 게 쉽지. 한달치도 팔고 세달치도 팔고 있었다. 사람이 습관이 형성되는 데에는 한달이면 충분하다. 다시 한번 내가 헬스를 열심히 했을 때를 떠올려보자. 한달로는 부족한 것 같다. 세 달치를 끊었다. 돈을 쓴다는 건 내가 뭔가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좋은 방식이다. 적어도 이전에 주로 쓰던 방식인 기분 풀릴 때까지 또는 내가 듣고 싶은 말이 나올 때까지 타로 카드나 사주 보는 것 보다 훨씬 낫고, 훨씬 싸다.


8. 글 쓰기 : 그래서 지금 쓰는 중이다.


9. 그림 그리기 : 다니던 미술 학원이 코로나로 망했다. 한달치 환불을 못받았다. 20만원 정도인데, 크다면 크고 적다면 적은 돈. 각자의 사정이란 안타까운 일이다. 나는 그걸 받기 위해 뭔가 조치를 취할 힘이 없다. 하지만 스케치북을 보면 짜증이 나는 것도 사실이다. 다음에 다시 시도하기로.




나는 아마 자살은 안 할 거야.  

 

딸들이 엄마처럼 살게 된다는 말은 어디서 나온걸까? 나는 그 말이 별로 달갑지 않았다. 죽고나면 묘비에 원하는 것을 얻었다고 쓰고 싶었다. 언젠가 다른 말을 쓰고 싶게 될까? 모른다. 사실 죽고 나면 묘비가 필요 없지. 나는 어차피 없는데, 남은 사람들이 쓰고 싶은 대로 쓰면 되는 일이다.


어제 스케이트 보드나 서핑을 같이 할 사람들을 알아보았다. 서핑을 배울 사람은 나 뿐이었지만, 바다에 가겠다는 사람은 있었다. 스케이트 보드 말고 롱보드를 타자는 사람도 있었다. 스케이트 강습에 자기 애인이랑 같이 가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내 애인은 차를 렌트해서 데려다 줄 수 있다고 했다. 인복이 많은 삶이다.


오늘 스케이트 보드 강습 신청이 언제부터 가능한지 알아보고, 서핑은 강습과 숙박 예약을 마쳤다. 그리고 이 글도 썼다. 오랜만에 일기도 썼다. 올리브영이 세일하길래 들려서 이것저것 사고. 마인딩인가 하는 앱도 결제했다.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모르는 척 하기로 한다. 서핑도 스케이트보드도 한번하고 다시는 안할 수도 아니면 안하게 될 수도 있지만, 그 앱에서 푸쉬로 나한테 뭘 적으라고 하는 건 3개월동안 지속되니까. 3개월 동안 생존신고를 하는 가격으로 나쁘지 않다.


뭘 이것저것 알아보고 신청하고 결제까지 하고나니, 죽으려면 멀었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혼자 신청하면 취소하고 안갈 게 뻔해서, 주변에 아는 사람들에게 카톡으로 묻느 것도 모자라 SNS에 같이 하러 갈 인간을 구했다. 이걸 보니 스스로 행동력이 어느 정도인지도 가늠할 줄 안다.


엄마처럼 안 사는게 대체로 많은 딸들의 꿈 아닌가, 엄마들의 바람도 마찬가지다.


"넌 엄마처럼 살지마. 공부 열심히해서 능력 가지고, 결혼은 하고 싶으면 하고 아니면 말아" 하는 클리셰.


아마 나는 엄마처럼 살지는 않을 거다. 나약하고 서글펐던 사람.  






https://youtu.be/jTiQZ_q6GPc

St. Vincent - Save Me From What I Want / Summerstage, in Central Park, NYC on August 1, 2010.


https://youtu.be/MdZSzM_mzT8

St. Vincent - Save Me From What I Want


매거진의 이전글 익숙한 고통이 주는 편안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