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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얼떨결정 Oct 17. 2020

고통에 점수 매기기

자기 연민의 덫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 것 같다. 일상의 고단함을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거나 혹은 그 고단함을 이겨내는 개인들을 대단하다고 추켜세우거나. 나는 어느 쪽으로 바라보는 것이 더 합리적인지, 더 정확한지 혹은 어느 쪽이 더 내 마음이 편안한지 결론을 내리기 어려웠다.


‘매일 하루하루를 살아내야 하는 것, 먹기 싫어도 먹어야만 살 수 있다는 것, 직장에서 부당한 일을 겪어도 참아야 하는 것, 몇 시에 잠을 자든 다음 날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야 하는 것.’


자신이 해냈으니 남들도 해낼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싫어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보통의 남들도 하는 일상을 고통스러운 걸로 보는 게 이해가 잘 안됐다. 사는 것 자체가 고단하는 것에 공감하면서도, 그걸 꽤 자주 느끼면서도 내 마음 한구석에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내가 있었다.


나는 남들의 고통을 평가하곤 했다. 동시에 나의 고통도 평가했다. 야근이 힘들다고 생각하다가도, 누군가가 힘들겠다고 말해주면 지나간 일들을 돌이켜보았다. 내 인생에 그 사건보다 힘든 게 또 있었나 하고 빠르게 계산했다. 그 일이 남긴 여러 가지 파장이, 굳이 겪지 않아도 되는 일들이 지금 이 순간과 비교하여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 생각했다.


다른 사람이 얼마나 어려울지는 머리로 쉽게 이해했다. 그러나 마음속 깊이 공감하지는 못했고. 공감은 대체로 공감하는 척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누군가가 ‘자기도 비슷한 걸 느낀 적이 있다’라고 말하면 ‘나는 내가 느낀 게 뭔지 아직도 모르는 데 너는 어떻게 알까’하고 의구심이 들었다.


그때는 어렸고, 너무 당황해서 무엇이 어떻게 힘든지조차 몰랐다. 스스로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만 감정이 올라온다고 했다. 엄마가 자살한 일은 아주 느리게 10년이 넘는 시간을 걸쳐서 사소한 사건들을 계기로 나를 덮쳤다. 대체로는 연인과의 이별은 좋은 계기가 되었고, 나는 그 사람을 잃어서 슬픈지 혹은 관계가 끊어지는 것에서 다른 무언가를 보는지 구분해내지 못했다.


인생에서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종류의 고난이나 불운, 그것도 스스로가 일으키지 않은 재난 같은 불운이 있는 사람들을 선호했다. 우리는 명확하게 서로를 서로가 완벽히 이해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고(혹은 그렇다고 믿었고), 대신 이해를 하려는 노력을 감사히 여겼고, 이해하지 못함을 비난하지 않았다. 그리고 서로의 불운 중 무엇이 더 고통스러운 지 내기하듯이 말하곤 했는데, 늘 마음속으로 서로가 늘 서로의 인생이 더 고달플 것 같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니다. 내 친구들은 대체로 내 인생을 좀 더 고달프게 여겼던 것 같다. 정확히 말하면 그날 우울한 사람 인생이 제일 운이 없던 걸로 쳤던 것 같다.


‘불행’이라고 썼다가, ‘불운’이라고 고쳐 썼다. 인생이 불행했냐면 그건 아니다. 사는 게 낫다고 여겨지는 많은 순간들이 있었다. 근데 아무리 돌이켜봐도 어떤 일은 일어나지 않는 것이 더 나았다. 그러니까 결과가 좋다고 해서 과정도 나쁘지 않았고 괜찮았다고 말할만한 그런 일이 아니었다.


내가 엄마의 자살로 무언가를 더 깊이 이해하고, 혹은 어떤 면에서 더 성숙하고, 여러 종류의 어려움을 잘 대처할 수 있게 되고 뭐 그런 수많은 부가 서비스 같은 장점이 있더라도 그 일은 없는 것이 더 나았다.


가끔씩 인생을 살면서 내가 내 인생의 어느 정도 불행을 썼는지 가늠해보곤 했다. 그리고 내심 안도했다. 더 큰일은 아마 없지 않을까? 물론 알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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