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히 또다시 아침이 온다
죽고 싶다는 기분이나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할 때면 궁금해했다.
‘엄마가 죽지 않았다면 나는 달랐을까?’
’엄마가 다른 방식으로 죽었다면 달랐을까?’
쉽게 답이 나오지 않았다.
엄마가 죽기 전에 내가 죽고 싶어 했던 적이 있었는지 돌이켜보면 그건 아니다. 하지만 엄마가 죽고 나서 내가 바로 죽고 싶어 했냐면 그것도 아니다. 그러나 죽고 싶다 혹은 죽는 게 낫겠다, 가볍게는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냐는 식의 생각은 점점 강해졌다.
엄마를 이해하려고 노력할수록 자살은 가깝게 느껴졌다. 엄마가 그런 선택을 한 이유가 무엇이었을지 고민해보면, 나는 정답을 찾을 수 없으면서도 나름대로 그 사람의 선택을 이해하려고 했다. 답을 찾을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답을 찾으려고 애썼지만 딱히 알아낼 수는 없었다. 이유를 알아낼 수 없는 것과 별개로 ‘그럴 만한 일이었다. 그럴 이유가 있었다. 그만큼 힘들었을 거다’라고 생각하거나 그런 선택이 나름의 해결책이나 도피처였다고 한 개인의 선택을 이해하려고 애쓰다 보면 내게 자살이 성큼 다가와있었다.
내 엄마가 아닌 한 개인으로 바라볼수록 더 이해됐다. 최진실이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고, 이혼을 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와중에 2007-08년 세계 금융 위기로 불안감이 큰 시기. 혼자 딸을 키우는 여성, 최근 가까운 지인을 자살로 잃은, 종교도 없는, 외가와는 연락하지 않는 만 40세 여성. 확률적으로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서 더 쉽게 죽겠지.
반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나를 두고 이제 중학교를 마친 딸을 두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하고 되묻다 보면 자살은 점점 멀어졌다. 그러나 엄마를 미워한다는 사실, 내가 엄마에게 특별한 위안을 건네주지도 않았으면서 엄마를 원망한다는 것이 미안했다. 엄마를 원망하거나 분노의 대상으로 삼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동정하는 것은 가능했지만, 화를 낼 수는 없었다.
오늘은 아는 지인에게 뜬금없이 ‘죽지 마’하고 이야기를 했다. 그 사람이 지나가듯 농담처럼 한 말이 마음이 쓰여서 그런 거였는데, ‘죽긴 왜 죽어. 죽을 용기 있으면 살아야지’하고 상투적인 대답을 하길래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힘든 이야기를 나눌 만큼 가까운 사이는 아니기 때문에 저 말이 안 죽겠다는 뜻인지, 혹은 굳이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인지, 나와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는 이야기인지, 약한 모습을 드러내고 싶지는 않다는 뜻인지는 알 수 없다. 그저 그 사람이 말하고 보여주는 그대로를 믿을 뿐.
나는 언제부터 누군가가 죽겠다는 말을 농담으로 하면 그게 마음에 남았을까? 엄마가 죽고 난 직후부터였다. 다른 모든 변화는 이게 변화인지 혹은 엄마의 죽음으로 인한 것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엄마가 죽은 이후에 나는 사람들이 죽고 싶다는 말을 농담처럼 하는 것에도 전전긍긍했다. 다행히 시간이 아주 많이 지나서 그 사이 수많은 친구들과 죽음을 농담처럼 쓰고 이제는 그러려니 하게 되었다.
남겨진 것이 너무 힘들어서 결코 이런 걸 남에게 겪게 하지 말아야지 싶다가도, 내가 살아남았다는 걸 깨닫고 내가 계속 살아가고 있다는 걸 인식하고 나면 반대로 그런 생각도 한다. 결국 살 사람은 살지 않을까? ‘힘들겠지만 뭐 나도 살고, 아빠도 사니까 남들도 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 날이면 나는 시계를 냉큼 보고 자정을 넘긴 시간인지를 확인한다. 그리고 자정을 넘겼으면, 지금 하는 생각들의 어떤 행동도 다음으로 미룬 채로 잠에 들려고 애쓴다. 늘 다행히 자정을 넘긴 시각이다.
그리고 또다시 아침이 다시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