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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얼떨결정 Nov 09. 2020

의미 찾기에 충실한 사람들을 보다가

내가 진실로 바라는 것

엄마가 자살하기 전에 내가 어땠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전의 나는 마치 내가 아니었던 것처럼 희미하고, 그때 내가 엄마가 만나는 남자 친구에 대해서 아무렇지 않은  거짓말을 했던 것, 가족보다 친구들을 훨씬  좋아했던 것, 그러면서도 내가 혼자라고 느꼈던 것들이 기억에 남는다. 친가와 훨씬 많은 시간을 보내고, 내게 잘해준 것도 친가 어른들과 사촌들이었지만 마음속 한구석에 벽이 있다는 느낌을  가졌다. 물론  벽은 엄마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커졌지만, 갑자기 생긴  아니라 분명  이전부터  마음속에 있던 감정이었다. 


아마도 나만 외동이었기 때문인  같다. 엄마와 아빠와  이상의 자식이 모인 가정을 나는 부러워했고, 자식들을 챙기는 엄마나 아빠를 보면 부러워했다. 가족들이 모이면 나는 혼자이거나 아빠가 있거나 했지만, 아빠는 사람들에게  자랑을 내가 보는 데서 하는 스타일도, 나를 유난히 챙기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나를 유독 챙겼지만 동시에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 속한 사람이고, 다른 친척들은 손님인 데에서 오는 차이가 있었다. 물놀이를  때면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이고 다른 사촌들은 부모가 있다고 느꼈던  같다. 실제로 그렇든 그렇지 않든. 


엄마가 자살한 이후의 나는 여러 가지 고민을 하다가도 아주 쉽게 ‘ 이게 그래서 무슨 의미가 있지?’하고 반문했다. 그러고 나면 의미를 찾을  없었다. 내가 원하는  얻고 성취한다고 해도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스스로를 다독였다. 지금 노력하는  힘드니까 혹은 지속하는  힘드니까 나를 속이는 거라고. 나는 원하는데, 힘드니까 그만두고 싶어서 별로 원하지 않고 그게 내게 주는 의미가 적다고 나를 속이는 거니까 속지 말고 열심히 하자고 나를 다잡았다. 


재미있어하는  없었다. 잘하지 않는 대부분의 것들은 재미가 없었고, 재미있고 원하고 성취하고 싶은 것들도 남들이  때는 간절해 보였지만 종종 굳이  그거여야만 하는  아니야”하고 말했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런데  그렇게 아등바등해? 그럼 도대체 네가 원하는  뭐야?”하고 물었다. 그럼 나는 작아진 채로 글쎄, 모르겠네.”하고 주눅이 들었다. 


어쩌면 원하는  아니었는데 스스로를 속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사람들이 자살을 하는  연구해서 내가 뭐하게? 그게  하고 싶지? 장학금을 받기 위해서 자기소개서를  때는 쉬웠다. 나 같은 사람이  생기지 않길 바라니까. 장학금을 정말 많이 받았다. 근데 그게 정말 내가 원하는 일인가? 


내가 원하는 것은 이런 세계 자체를 모르는 . 있다는  자체를 모르고 “진짜 자살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고 말할  있는 . 오늘  사람을 내일도  것이라고 삶의 대부분의 순간을 의심 없이 살아갈  있는 . 내가 자살이든 갑자기 죽는 노동자든 뭐든 그런 연구 자체를 하고 싶어 하지 조차 않는 . 그런 세계가 있다는  자체를 모르는 .


의미부여를 잘하고 순간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들을 만나면 기뻤다. 어떤 순간이 귀하다는  아는 사람들을 만나면  역시 그러하기에 반가웠다. 그러나  사람들이  순간이 끝나가는 것을 슬퍼하고, 아쉬워하고, 너무 마음이 아파서 차라리  순간이 없었으면 하고 잠시라도 바라는  보고 있으면 곧바로 자각했다. 나랑은 다르구나. 다른 이유로 의미를 부여하는구나. 사라질 것을 알아서, 영원한  없다는  알아서, 당연히 언젠가 끊어질 인연이므로  순간이 있었음이 감사한 건데. 그리고 깊은 괴리감을 느꼈다. 원래 사라지는 거인걸. 내가 소중히 여기든 아니든 무언가는 내가 손써볼 틈도 없이 그냥 갑자기 사라질  있는 거고, 그건 어쩔  없는 건데. 


엄마를 자살로 잃고 나서 가장 자주 강렬하게 느끼는 감정은 공허감 같은 거다. 뭔가 하기 싫다는 생각은 아니지만 무기력함도 덤이다.  모든  무슨 의미가 있냐는 생각. 그래서 행동으로 옮기고 싶지 않다는 생각. 그니까 인터넷이나 논문에 흔히 떠도는 말로는 의미에 대한 위기. 실존적 공허, 지나친 권태로움. 즐거워 보이는 것은 많지만 모든 것에 굳이?’라고 따라붙는 의문들. 엄마가 없는데 이게 무슨 의미가 있지?’ 같은 류의 감정은 아니다. 그렇게 느낄 만큼 친밀한 사이가 아니었다. 


우리 엄마는 사는  힘들어서, 살아갈 용기가 없어서 죽었을까, 아니면 의미가 없다고 느껴져서 죽었을까.  이유로 스스로의 선택에 정당성과 근거를 부여했을까? 하나뿐인 딸을 두고 그냥 스스로 죽을만한 타당한 이유가 뭐가 있었을까? 모르겠다. 그리고 이걸 알아내서 뭐할 건데’ 하는 생각이 동시에 든다.  수도 없지만, 내가  마음에 드는 답을 내릴 수도 없고, 사실 어떤  마음에 드는 답인지도 모르겠고, 정해서 뭐할 건데 하는 생각. 내가 엄마가 죽은 타당한 이유를 해석해내고, 엄마를 이해한다고 해서  지나간 시간들이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앞으로가 달라지니 답을 언젠가는 내려야겠지. 시간이 해결해  거라고 믿는다. 시간이 지나고 내가 조금  받아들일  있게 되면  다른 답을 찾을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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