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살 유가족의 감정 1 : 죄책감
어항을 함께 헤엄치던 물고기 중 어느 한 물고기가 어항 밖으로 몸을 날릴 때, 그 물고기가 어떻게 되는지 남은 물고기들은 알 수가 없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어항에 물고기는 한 마리가 아니라 여러 마리였고, 남겨진 물고기들의 인생이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가게 된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자살을 사람들은 예상할 수 있을까? 누군가가 우울해하는 것을 알 수는 있다. 만약 자살이나 자해를 시도한 적 있다면, 언제나 긴장한 채로 언제 그 사람이 삶을 포기하고 싶어 할지 주의를 기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매일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내 곁의 누군가가 자살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쉽지 않다. 아주 가끔 하더라도, 일상의 사사로운 움직임 속에서 빠르게 흩어진다.
그래서 대부분 자살은 별 볼일 없던 일상에 아무런 예고도 없이 닥친다.
미국정신의학협회에 따르면 남겨진 유가족의 고통은 홀로코스트 피해자와 비슷하다고 한다. 믿기 어렵지만, 자살 유가족은 자살할 확률도 다른 신체적, 정신적 질병의 유병률도 일반인에 비해 높아진다. 누군가는 자살이나 우울이 유전이라서 그렇다고 편견을 가지기도 하지만, 사실 자살이라는 사건 자체가 주는 파괴력을 생각해보면 유전이 아니라도 마찬가지 일 것 같다.
누군가의 자살이 그토록 가족들에게 파괴력을 지니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의 이유인 감정적인 혼란은 이로 말할 수가 없다. 우선 자살의 수단 자체가 폭력적이기 때문에 어떠한 방법이든 아주 극단적인 상황을 마주했을 때의 충격을 감당해야 한다. 이 충격은 특정 장면을 상상하게 되는데서 오는 충격과 그 사람이 스스로 선택해서 생을 마감했다는 그 사실 자체에서 오는 충격을 모두 포함한다.
이 충격과 동시에 찾아오는 재앙과도 같은 질문이 있다.
왜?
'왜 그랬는데?'라는 질문은 그 사람에 대해 기억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기억해내게 한다. 그리고 이때의 기억은 소름 돋게도 지나치게 일상적인 것들이다. 가벼운 짜증, 잔소리, 무관심 같은 누구나 다 하고 사는 것들을 내가 그 사람에게 하였었다는 사실이 가족들을 압도시킨다. 특히나 다툼 사이에서 생기는 서로에게 상처가 되는 말 같은 것들은 내가 어쩌면 그 사람의 죽음의 원인이 되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이건 내가 죽음의 원인이 되었다는 단순한 죄책감이 아니다. 그 이유는 자살자가 죽은 명확한 이유를 유가족은 결코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자살의 구체적인 이유는 짐작할 수는 있지만 영원히 알 수 없는 질문으로 남아 버린다. 때문에 가족들의 죄책감은 '내가 만약 그때 다르게 했다면, 무언가를 했다면, 하지 않았다면, 그 말을 안 했다면 바뀌지 않았을까?'라는 이미 이룰 수 없는 희망과 기대에서 생겨난다.
이 죄책감이라는 감정은 큰 다툼이 아닌 일상적인 말을 포함한 모든 생활, 같이한 모든 순간, 혹은 같이 하지 않았지만 그 사람에 대해 했던 생각 등 전 영역으로 퍼진다. 떠올리는 모든 것에 그때 순간 이외의 가능성에 대해서 곱씹게 된다.
나는 엄마가 소중한 지인을 잃어서 슬퍼할 때, 그 사람의 장례도 무덤도 함께 가주지 않았다. 학교 다니기 바빴고, 장례식은 어른들의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나를 견딜 수 없게 한 것은 가주지 않았다는 사실이 아니다.
나를 비참하게 했던 건 내가 친구와 통화를 하면서 "어머니는 좀 괜찮으시니?"라는 질문에 "안 괜찮으면 어쩔 건데"라고 했던 답이다.
나를 힘들게 했던 또 다른 기억은 엄마가 죽기 무려 4,5년 전쯤에 학원비 문제로 엄마와 다툰 것이다.
누군가가 죽으면 남겨진 사람들은 그 사람에 대해 기억해 낼 수 있는 모든 부분에 대해 회고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함께해서 행복하고 즐거웠던 기억은 모두 퇴색된다. 누군가가 자살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인생을 회색 빛으로 생각하게 한다. 그 사람의 삶이 내가 알지 못하는 많은 부분이 비참했으리라고 생각하게 된다.
내가 가진 엄마와의 추억은 내가 무언가 실수를 했거나 혹은 불쌍하고 힘들었던 그 사람의 인생의 아주 사소한 일부분이 되어 버렸다. 다른 몇몇 죽음들과는 다르게 자살자와의 행복했던 기억을 추억하면서 '그래도 잘 살다 갔어'라는 식의 위로는 거의 불가능하다.
모든 유가족들이 이러한 과정을 자살자의 죽음 이후에 거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생략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죽음에 대한 생각 자체를 거부했다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겪기도 하고, 원망과 분노와 함께 혼란스럽게 겪기도 한다. 하지만 죄책감이라는 감정은 유가족들에게는 핵심적인 감정으로 남으며, 자식을 잃은 부모의 경우 더욱더 강하다.
정말로 견딜 수 없는 것은 이 질문이 시작됨과 동시에, 자살 이후에 필연적으로 이 질문이 따라온다는 점에서 누군가가 자살을 한 이후에는, 남겨진 유가족의 삶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흘러간다는 것이다. 전혀 변한 게 없어 보여도 완전히 뒤바뀐다. 마치 어항의 물고기가 어항 밖의 몸을 던진 게 아니라 어항을 깨고 그 틈으로 사라져, 어항 속의 물이 쉴 틈 없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나는 물 대신 죄책감을 얻은 물고기 같았다.
나는 자살한 사람에 대한 생각을 거부하거나 회피하지 않고도 견뎌낼 수 있게 된 그 순간부터, 위와 같은 생각에 압도당하면서 내 삶이 어떻게 뒤바꼈는지 기억한다. 나는 일어나는 모든 일에 내 잘못을 집어낼 수 있게 되었다. 굳이 엄마와 관련된 일이 아니라, 그냥 삶을 살아가면서 생기는 크고 작은 사건, 만남, 문제 등에서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골라낼 수 없었던 적이 없다.
모든 문제가 그렇듯이 한 곳에 100%의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당연하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남 탓을 할 수도 있는 상황, 혹은 명백히 내가 특별한 실수를 한 적이 없는 상황에서도 내가 무언가를 미리 생각하지 못해서, 혹은 내가 지나치게 조심해서 등등 아주 다양한 이유로 내 스스로의 잘못이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모든 자살 유가족이 죄책감이라는 감정을 죽은 자살자 이외의 보통 사람들에게도 확장시키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정확하고 명확하게 내 잘못을 내가 조금이라도 관련된 모든 일에서 골라낼 수 있게 되었고, 그게 내 잘못임을 더 확인하거나, 그게 아니라고 스스로를 설득시키기 위해 지나치게 노력해야 했다.
이건 정말 끔찍하다. 스스로를 비난하는 잘못된 태도에 끊임없이 근거와 이유를 나열할 수 있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옆에서 누군가가 그건 네 잘못이 아니라 상황이 안 좋았다고 말해주면, 그 상황을 예측하지 못한 것, 혹은 그 상황에 대처하지 못한 것, 또는 이거에 대해서 너무 지나치게 고민하는 내 탓으로 비난의 화살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친구 혹은 연인과 관계가 끊어질 때, 혹은 누군가와 자연스럽게 멀어질 때, 소중한 사람과 다투게 될 때의 고통은 관계의 죽음을 기리듯이 지나간 모든 과정에서 내 잘못을 찾는 것으로 귀결된다.
밀란 쿤데라의 '무의미의 축제'에서는 사과 쟁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나 자신한테 화가 나서 그래. 나는 왜 틈만 나면 죄책감을 느끼는 걸까?"
"괜찮아"
"죄책감을 느끼느냐 안 느끼느냐. 모든 문제는 여기에 있는 것 같아. 삶이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지. 다들 알아. 하지만 어느 정도 문명화된 사회에서 그 투쟁은 어떻게 펼쳐지지? 보자마자 사람들이 서로 달려들 수는 없잖아. 그 대신 다른 사람들한테 잘못을 뒤집어 씌우는 거야. 다른 이를 죄인으로 만드는 자는 승리하리라. 자기 잘못이라 고백하는 자는 패하리라...(중략)... 사실 둘 다 서로에게 부딪힌 사람이면서 동시에 서로 부딪친 사람이지. 그런데 즉각, 자발적으로, 자기가 부딪쳤다고, 그러니까 자기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 그런가 하면 또 즉각, 자발적으로 자기가 상대에게 부딪힌 거라고, 그러니까 자기는 잘못한 게 없다면서 대뜸 상대방을 응징하려는 사람들이 있지."
차이가 있다면, 나는 죄책감을 느끼는 자신에게 화가 나는 게 아니라, 그냥 죄책감을 느끼고 스스로가 잘못했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거다. 이는 내 삶을 어항에 살던 물고기를 꺼내 물 한 방울을 떨어뜨리며 숨을 붙여준 것과 같았다. 왜냐하면 죄책감이라는 감정을 다시 느끼지 않기 위하여 걱정하고, 미리 준비하고, 계획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느끼게 되지만.
아주 많은 걱정과 스트레스로 늘 긴장된 채로 살고, 쉬는 동안 과거의 일을 자책하거나 미래의 일을 걱정한다. 꿈을 꾸면 꿈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어떻게 할지, 누가 죽는다면 그 뒤는 어떻게 할지, 뉴스에서만 보던 일이 내게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할지. 내가 무슨 감정을 느끼는지는 뒤로 감추어지고,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서만 생각하게 된다. 이로 인해 많은 것을 얻었다. 학업과 진학에서의 성취 등등. 그리고 나는 감히 무엇인지 알지도 못할 많은 것을 잃었다.
모든 유가족들이 나와 같은 방식으로 죄책감에 대처하지는 않는다. 누군가는 그 사람이 남긴 모든 기록물을 헤집는다. 나는 아직 한 번도 시도해 본 적이 없다. 나는 그 사람의 기록을 직면하는 대신 그 외의 모든 나의 삶의 일정 부분을 반성과 계획 또는 죄책감과 소모적인 걱정에게 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