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가지 가정들 1_또다른 나를 만날 때
엄마가 자살로 세상을 떠난 뒤에 언제쯤 이 사실이 괜찮아질 것인가에 대해서 종종 생각했다.
딱히 논리적인 생각은 아니지만 직감적으로 드는 몇 가지 순간이 있고 그 첫 번째는 비슷한 사례 만나기다. 유사한 경험을 한 사람을 만나서 어떻게 지내는지 이야기를 듣고, 이 고통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걸 안다는 것 자체가 위로가 된다고 한다.
자조모임도 나가고, 책도 많이 읽고, 상담 사례집 같은 것도 열심히 찾아 읽었다.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특히 자조모임이나 전문 기관의 모임에 나가면 유가족들의 마음을 설명해주는 여러 개념을 들을 수 있다. 심리학이든 정신의학이든 유가족이 그 고통을 어떻게 해결해나갈 수 있는지에 대한 다양한 설명을 들을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애석하게도 개개인의 가정사는 모두 다 달라서 내가 상상한 영화 같은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을 만나는 경험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와 비슷하게 10대였으며, 외동이면서, 같은 성별의 부모가, 이혼 가정이며, 경제적으로는 최소 중하. 빚은 없으나(담보로 걸 것이 없기에) 자가가 없어야 하고 뭐 그런 것들. 그 일을 목격하고 신고한 당사자이나, 그 사건이 발생하는 순간에 그걸 목격할 만큼 극단적이지는 않은 뭐 그런... 유서는 있으면 좋은데 짧아야 하고, 이유는 적혀있지 않아야 한다. 물론 이렇게 자세히 서로 이야기할 일은 없다.
구체적인 순간들이나 시기는 둘째 치더라도 외동이고 이혼가정에서 그러한 일을 겪은 누군가도 만나지 못했다. 우선 그렇게 자세하게 이야기를 할 일이 많지 않기도 하고, 실제로도 잘 없다. 확률은 곱하기다 보니 이것저것 곱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다. 앞으로도 만날 일은 없겠지. 나이가 들수록 이런 이야기는 사람들과 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외동이 아니길 바랐는데, 나는 외동이었다. 내게 형제, 자매가 있었더라면 누군가와 분명 이걸 공유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외로웠다. 부모님이 이혼이라도 안 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엄마가 그런 선택을 하기 무려 10년도 더 전에 우리 부모님은 서로가 남남이 되기를 택했다.
자조모임에 나가는 건 누군가에게는 꽤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특히 고인과 관계가 동일한 모임에 나가는 게 좋아 보였다. 그 기관에서 나를 염려하거나 혹은 사람들이 서로에게 연민을 가지는 것들, 새로 온 누군가가 오면 이미 다 지난 이야기더라도 다시 꺼내서 서로가 괜찮아질 수도 있다고 이야기해주는 것들이 좋았다.
다만, 나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내 주변의 지인들에게도 이 이야기를 쉽게 자주 이야기하던 사람이었고, 그건 아주 드문 케이스였다. 나는 위화감을 느꼈고, 내가 그런 방식으로 주변 사람에게 나의 가정사를 구구절절 늘어놓거나 우는 게 상대를 당황스럽게 하고 폭력적일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나는 내 방식을 바꾸지 않았고, 자조모임에 나가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유사한 사례를 만나거나, 들어본 적은 없었다. 어딘가에 있다는 걸 안다. 그러나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다 한들 괜찮아진다는 보장은 없었다. 괜찮다는 게 어떤 상태여야 괜찮아지는 건지 알 수 없었고, 어쩌면 지금도 이미 괜찮은 상태일 수 있다. 다만 만난다면 그 상대의 이해한다는 말은 조금 다르게 들릴 수도 있다. 나는 내게 이해한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대부분 싫어했고, 그들의 공감능력이나 진심은 쉽게 거절하고 무시했다. 이런 나쁜 습관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사람들의 말이 진심인 건 알 수 있었다. 안다고해서 내 거부감이 변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어딘가 살고 있을 또다른 나를 만나고 싶었다. 그래서 넌 어떻게 그 시간들을 버텼냐고 묻고, 그 방식 중 어느 하나도 왜 그렇게 했냐고 되묻지 않은 채 고생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