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 편지 3.
너는 스스로를 뭐라고 표현하니?
자살 유가족이 아닌 다른 많은 것들 말이야. 너의 이름, 직업, 취미, 네가 사랑하는 사소한 것들 이런 거. 이제 와서 소개를 하자면 나는 직장인이고, 이제 만으로 스물아홉인 여성이네. 대학원을 나왔고, 록음악을 좋아하고, 수제 캐러멜을 좋아해. 초록색도 좋아하고.
Suicide survivor라는 영어 표현이 자살 유가족을 뜻하는 말이라는 거 알고 있어? 자살 시도를 했다가 살아난 사람이 아니라, 유가족을 의미한대. 한국에서 직역해서 자살 생존자 뭐 이렇게 부르기도 하는 것 같아. 자살 이후에 남겨진 사람들이 겪는 고통이 너무 커서 그렇게 부른다나. 나는 처음에 듣고 '아니 무슨 생존씩이나...?' 했다니까.
자살 생존자라고도 많이 번역하는 것 같고, 자살 사별자라고 하는 글도 봤고, 최근에는 일상 사별자로 재해석하는 글도 봤었어. 너는 어떤 표현을 좋아할지 모르겠네. 왜냐면 네가 선호하는 표현으로 편지를 쓰고 싶거든. 네 마음이 조금이라도 덜 불편하면 좋겠는데, 당장 방법이 없으니 내가 왜 다른 말이 아니라 '자살 유가족'이라고 쓰는지 설명하는 게 낫겠다.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기사를 보고 있으면 다른 표현보다는 ‘자살 유가족’이라는 표현이 더 나은 것 같아. ‘유가족’이라는 말은 흔히 어떤 사회적인 책임을 요구하는 것 같은 뉘앙스가 있잖아.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는 어떤 재해/재난/사건/범죄 등에서 유가족이라고 부르잖아. 그래서 다른 표현보다는 자살 유가족이라는 표현을 더 좋아해. 한국 사람들이 유전자가 유별나서 다른 나라 사람보다 자살을 많이 하겠어? 1997년 외환위기 이전에는 안 그랬어. 사람들이 자살을 하는 이유는 다 제각각이고 나름의 사정과 이유가 있겠지. 하지만 사회 구조에서 오는 부분도 있다고 생각하거든. 물론 같은 상황에서도 누구는 다른 선택을 하니 사회 구조만의 문제는 아닐 거야.
우리 엄마가 그런 선택을 했던 때 2008년이고, 한국에서는 10만 명당 26명이 죽었어. 2007년~2008년 세계 금융 위기 이후 한국 자살률은 2009~2011년 모두 10만 명당 30명이 넘어. 2008년에는 유명 연예인이 자살한 이후 자극적인 보도가 쏟아졌거든. 그 보도 이후 약 2개월 간 자살한 사람이 3081명으로 2007년 동일 기간 1807명 대비 크게 늘었대. 베르테르 효과라고 유명인이 자살하면 영향을 받아 자살률이 높아지는 현상이야. 우리 엄마도 비슷한 시기야. 물론 우리 엄마가 그런 선택을 한 다른 개인적인 이유도 있지. 그래도 괜히 그때 언론보도가 좀 달랐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종종해. 달라지는 게 있었을까? 모르지. 정말 많은 사람들이 힘든 상황에서 그 기사를 보았을 텐데 누군가는 그래도 살았겠지. 나도 알아.
다른 표현보다는 유가족이라는 표현이 자살의 사회적 측면을 보여준다고 생각해서 난 그 말을 쉽게 썼던 것 같아. 더 희망적으로 이야기하면 사회적으로 무언가를 하면 달라질 수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는 말처럼 가끔 느껴지기도 하고 말이야. 사회가 변한 들 우리 엄마는 없지만 또 모르지. 누군가는 살 거 아냐.
오랜만에 찾아보니 2020년 자살률은 10만 명당 25.7명이네. 하루에 몇 명인지, 1시간에 몇 명인지 같은 건 굳이 찾아보지 말자. 그 숫자로 보면 꽤 무섭거든. OECD 국가 중 1위고, 꽤 오래 1위이다가 중간에 2017년인가 갑자기 2위였던 적이 있는데, 한국이 특별히 자살률이 낮아진 건 아니고 자살률이 높은 다른 국가가 OECD 회원국으로 새로 가입한 적이 있었어. 어차피 2019년에 다시 1위야.
기사로 자주 보이는 건 청소년이나 젊은 세대의 자살이지만, 경제가 발달하고 의료가 발달한 나라에서 젊은 연령대 죽음의 이유가 자살이 되는 건 좀 보편적이래. 다른 이유로 죽을 일이 없으니까 자살이 죽음의 이유에서 높은 순위가 되는 거지. 반면 한국은 노인 자살률이 정말 높은 나라야. 기형적일 만큼 높아서, 얼마나 많은 성인들이 부모를 자살로 잃는지 상상이 잘 안가. 65세 이상으로 한정해보면 oecd 평균은 10만 명중 17.2명이고 한국은 46.6명이라 두배 이상 높아(2019년 기준). 80세 이상은 67.4명. 하루에 몇 명인지 같은 구체적인 숫자나 이유를 같이 가늠해보진 말자. 숫자가 극단적이어서 왠지 무력해.
평소에는 떠올리지 않다가 글을 쓰거나, 혹은 혼자 우울해질 때면 스스로를 자살 유가족이라고 이름 붙이곤 해. 글 쓸 때를 빼고는 내가 지금 슬프거나 우울한 건 자살 유가족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누구라도 이런 상황에서는 그런 걸까 하고 구분하려고 자살 유가족인 나와 아닌 나를 구분하곤 해.
너는 평소에 스스로를 어떻게 표현하니? 나는 별 거 없어. 금요일을 기다리는 직장인, 시대에 맞지 않게 서른이 되는 기분이 뭔지 고민하는 한국 나이 서른의 여성, '대학원 논문이 정말로 라면 받침이 되는 군'하고 신기해하는 졸업장 소유자. 커피는 아메리카노보다 라테를 좋아하고, 핸드드립 기구는 있지만 커피를 직접 내려마시지는 않는 사람. 가방을 살 때면 아무 데서나 들 수 있는 검정과 그냥 예뻐 보이는 진한 초록 색 중에 고민하지. 그리고 너한테 편지를 쓸 때면 '내가 자살 유가족이구나'하고 새삼스럽게 떠올려.
평소에 네가 스스로를 부르는 방식이 예전과 완전히 동일해도 괜찮아. 가끔 슬픈 생각이 날 때면 자살 유가족으로 스스로를 규정해도 좋고, 혹은 다른 사람들이 한 것처럼 자살 사별자, 일상 사별자 같은 단어도 좋은 것 같아. 일상 사별자라고 이름 붙인 작가는 자살이 아닌 평범한 사별로 해석하는 게 도움이 된 것 같더라고. 정말로 무엇이든 네 마음이 편하다면 좋아. 나는 그냥 다른 말보다는 자살 유가족이라는 말이 좋았다고 말해주고 싶었어.
정 반대로 이름 붙이지 않아도 괜찮아. 자살 유가족으로 스스로를 생각할지 말지 모두 네 자유 아니겠어? 내가 자조모임(자살 유가족 모임)에서 만난 어떤 사람은 스스로를 평소에 자살 유가족이라고 규정하지 않는다고 했어. 굳이 그럴 필요 없다고. 나는 겪는 것들을 이해하고 소화하기 위해 이름을 꼭 붙여야만 했거든. 근데 그 사람은 이름 붙이지 않기 때문에 더 자연스럽게 그 과정을 지나쳤대. 어느 방향이든 네 마음 편한 쪽으로 했으면 좋겠어. 사람이 자신의 경험을 해석하는 방법이 다 다른 건 당연한 거잖아.
중요한 건 우리는 소중한 누군가를 잃었고, 그걸로 마음이 아프다는 것뿐이야. 그 마음을 언제쯤 어떤 방식으로 달래줄지는 정답이 있는 게 아니니까, 속도도 방식도 자유롭게 하자. 나는 이름을 붙였지만, 너도 알잖아?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 소중한 누군가를 잃어. 누구나 공평하게 잃지. 적어도 아직까지 죽음은 누구에게나 오니까. 언제 어떤 방식인지는 모두 다른 거고, 상실을 해석하는 방식도 시간도 달라.
한 번에 결론이 내려지거나 감정이 해소되지 않는다고 조급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미 곱씹고 지나갔다고 여긴 생각과 감정이 다시금 찾아와도 너무 놀라지 말고 말이야. 나도 천천히 하는 중이니, 너도 네게 꼭 시간을 주면 좋겠다. 오늘은 괜히 정확한 숫자를 본답시고 찾아보다가 자살률 수치가 별로 안 낮아진 것 같아서 마음이 안 좋네. 그래도 난 세상이 좀 변했다고 느끼는 부분이 있거든, 그건 다음번에 또 쓸게.
너한테 편지를 쓰다 보면 이래도 괜찮다, 저래도 괜찮다 나는 이랬다 저랬다 이런 이야기를 계속하면서 좀 의미 없다고 느끼기도 해. 근데 뭐 다른 거라고 특별히 의미가 있겠니? 우습지만 의미가 없어서 아무 말이나 편하게 쓴다. 편지를 쓰니 우울한 이야기보다는 다정한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게 즐겁기도 하고 말이야. 나는 늘 누군가 내게 괜찮냐고 물어봐주길, 그리고 괜찮고 괜찮을 거라고 말해주길 간절히 꽤 오래 바란 채 살았어서 네게 이걸 쓰나 봐.
누군지도 모를 사람들이 스스로 죽었다는 통계와 그 뒤에 남겨진 유가족에 대한 숫자들을 보고 있으면 그런 생각이 들어. 정말 많구나. 다들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그 사람도 이렇게 힘들까? 아니면 그냥 잘 살고 있을까? 너는 어때?
오늘도 편안하길.
2022년 9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