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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리별 Apr 25. 2024

  달리는 마음

4월 7일에 10km 마라톤을 했다. 2019년에 10km를 3번 뛰었는데 다 같이 뛰는 재미가 있었다. 2020년에는 코로나로 함께 뛰는 행사는 없어졌다. 앱을 통해 혼자 뛰고 기록을 인증받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나는 혼자 10km나 되는 거리를 뛸 수 없다. 대회도 없고 코로나로 기분이 가라앉아서 달리기를 쉬었다. 작년부터 대회가 열리기 시작해서 5km를 두 번 참가했다. 올해는 그동안 달리지 못한 사람들이 모두 모였는지 2만 8천 명이나 참가했다.


작년 대구 중구에서 만 명이 모였을 때도 열기가 대단했는데 스타디움 앞에 모인 3만여 명을 보니 괜스레 가슴이 뭉클해졌다. 월드컵대로 5차선이 참가자들로 가득 찼다.


그날 나는 황당한 짓을 했다. 출발 시간을 어이없이 착각해서 늦게 도착했다. 이미 풀코스 선수들이 달리고 있어서 도로를 건너갈 수 없었다. 자전거를 대충 세워놓고 지하도로 건너갔다. 출발선에는 10km 참가자들이 이미 대기하고 있었다. 물품 보관소까지 갈 시간이 없어서 잠바를 화장실 옆 기둥에 묶어놓고 출발선으로 달려갔다. 잠바 안에는 카드와 현금이 조금 있었다. 대책 없는 짓이었다.


10km 참가자들은 이미 출발해서 5km 참가자들과 함께 출발했다. 내리막이라서 천천히 뛰었다. 오르막은 힘들지만 내리막은 무섭다. 시지고등학교 앞까지 이어지는 내리막을 천천히 달리다가 반환점을 돌았다. 완만한 오르막이 이어졌는데 고개를 들어 앞을 보니 참가자들의 붉은 티셔츠가 도로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사람들은 힘차게 땅을 박차고 전진하고 있었다. 심장이 쿵쿵쿵 북처럼 울리면서 허리가 꼿꼿이 세워졌다. 나도 더 빠르게 더 힘차게 앞으로 달려가고 싶어졌다. 감동은 힘을 끌어올리는 도화선이 되는 게 확실했다. 오르막을 올랐다. 유모차를 밀면서 달리는 젊은 아빠를 만났다. 유모차를 밀면서 달리는 젊은 아의 팔다리는 햇살에 반짝였다.


삼성 라이온즈파크 앞 사거리에서 연호네거리 방향으로 달렸다. 야구장 앞 버스 정류장 벚나무에 꽃이 활짝 피었다. 분홍빛 꽃잎이 바람 따라 한두 장씩 흩날렸다. 영화 같았다. 내 눈이 아닌 사진작가가 촬영한 것을 보는 것처럼 비현실적인 감각이 느껴졌다. 한껏 고양된 마음이 꽃과 세상을 더 아름답게 바라보고 있었다. 도로는 더웠고 얼굴은 발갛게 익었다. 연호 네거리까지는 다시 내리막이었다. 천천히 내려가다가 급수대에서 물을 받아서 입을 2번 헹구고 조금 마셨다. 물을 마시고 아르기닌도 한 봉지 먹었는데 입가와 손이 진득해졌다. 멈춰서 천천히 먹고 손을 씻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물을 마신 후 방광에 자극이 가서 자꾸 화장실에 가고 싶어졌다. 연호네거리에서 경기장 방향으로 유턴해서 달렸다. 완만한 오르막을 달렸다. 그 오르막은 6km에서 6.5km 지점이었다.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복근운동할 때처럼 아랫배가 끊어질 것 같았고 토할 것 같았다. 달릴 수 없었다. 멈춰서 걸었다. 걷는 사람들도 뛰는 사람들도 힘들어 보였다. 잠시 뒤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걸으면 고관절이나 무릎이 더 힘들다. 천천히 달렸다. 9km 지점을 통과하면 스타디움 바깥 도로인데 경사가 아주 완만하지만 오르막이다. 기운이 빠져서 3-4번 걸었다. 다시 달려서 스타디움 안 쪽으로 진입했다. 마지막 발판을 밟았다. 잔디밭으로 가서 신발과 양말을 벗고 생수를 한 병 받아서 마셨다.


성취감과 안도감이 몰려왔다. 바로 잠바와 카드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찾으러 갔는데 옷도 보이지 않고 동호회 부스도 보이지 않았다. '아, 이상하다. 화장실 옆 맞는데 벌써 철수를 했나...'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운영본부에 가서 분실물이 있냐고 물어봤다. 그 사이 1등을 한 케냐선수가 들어오고 있었다. 상위그룹이 지나가고 나서 빠르게 길을 건너서 옆쪽 출구로 나갔다. 그쪽 출구 앞에도 화장실이 하나 있었다. 동호회 부스가 보였고 화장실 옆 기둥에 잠바와 카드는 그대로 묶여 있었다. 감사했다. 메달을 받고 자전거를 끌고 옆에 있는 호수가를 맨발로 조금 걸었다. 왼쪽 발가락에 쥐가 났다. 발바닥도 오그라 들었다.


대회 나가기 전 걱정되고 힘들던 마음은 사라졌다. 새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이 두둥실 떠가는 산뜻한 기분이 들었다. 가끔 이 정도는 뛰어줘야 된다는 기특(?)한 생각이 들었다. 생각이 끊어지고 감정이 사라지는 편안한 기분은 어떤 경험과도 비교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




대회를 마치고 일주일이 지났다. 터져 나오는 도파민이 사그라들면서 기분이 조금 가라앉았다. 5월 영남 마라톤을 신청했다. 달리기 연습이 몸에 익어가서 한 번 더 달려보고 싶어졌다. 햇살 아래 반짝이는 러너들의 대퇴사두근도 보고 싶었다. 그래서 말인데 이제 앞으로는 우리가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까...


'아... 저 사람 근육 좀 봐... 허벅지가 단단하네, 저 골반 좀 봐... 신체 중력선이 정확하네... 저 사람은 뇌가 아주 활성화되어 있을 것 같아... 멋지다...'


매력은 몸에서 나오고 몸은 운동으로 만들어진다.


 


#마라톤#대퇴사두근#몸#마음#도파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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