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평생을 정색하고 살아온 아버지가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진지 일색의 삶을 마감한 것이다."
"아버지의 민중이 그날 밤 내게 남긴 것은 벼룩이었다. 대신 가져간 것은 서까래에 매달아놓은 마늘 반접이었다. 나는 한달 가까이 북북 몸을 긁으며 민중을 욕하다가, 혁명가를 탓하다가, 그러다가 불현듯, 낄낄 웃음을 터뜨리곤 했다. 사라진 마늘 반접이 내 부모의 진지에 대한 통렬한 배신처럼 느껴진 까닭이었다. 그러나 배신당한 당사자들은 나와 달리 배신이라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았다."
"하의 상, 상중하로 나눈 중에서 하의 상, 그러니까 9등급 중에 7등급이라는 뜻이었다. 아버지 똑 닮은 나는 생각했다. 아버지가 아무리 객관적이라고 해도 딸이니 한 등급 정도는 올렸을 테지. 내 외모는 객관적으로 9등급 중에 8등급이구나.
아버지는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되었다. 말로 천냥 빚도 갚는다고 하지 않는가. 사람들이 왜 화장을 하겠느냐, 옷발이라는 말이 왜 존재하겠느냐 등등 아버지가 할 수 있었던 수많은 말이 있었다. 그렇게 딸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말 말고도."
"그날 아버지는 트럭 밑에 깔려 산산조각난 한씨 사위의 시신을, 구급대원들조차 감히 손대지 못하는 처참한 시신을, 목 잘린 동지나 총 맞아 내장이며 뇌수 튀어나온 동지의 시신을 거둔 바 있는 빨치산의 특기를 되살려 직접 수습하고, 병원이며 장례식장을 주선하느라 동분서주하다가 밤늦게야 돌아왔다. 그때까지 어머니는 논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 그러나 어찌 됐든 가난한 빨치산의 장례식에는 날고 기는 사람들의 장례식에도 없을 전복죽이 있다! 어쩐지 마음이 언니가 뽀땃하게 끓여 온 전복죽처럼 뽀땃해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작은 봉지에 나눠 온 아버지의 유골을 한줌 집어 손을 허공으로 들어올렸다. 유골은 밀가루처럼 매끄럽지는 않았고, 만지면 뽀드득 소리가 날 것 같았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을 타고 뼛가루가 교정으로 날아갔다. 저 교정 어디선가 아버지는 첫사랑 동급생 여자애의 고무줄을 끊었다."
내 아버지는 1945년 생이시다. 해방되던 해 태어나셨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날 때 6살이었을 것이다. 7살에는 할머니와 떨어져 할아버지와 큰 누나와 함께 고향 인근 대처(?)로 이사 나오셨다. 너무 일찍 할머니와 떨어진 탓인지 할아버지가 공부 압박을 심하게 하셨는지 아니면 타고난 기질 때문인지 학창시절 할머니 속을 많이 썩였다고 한다. 자식들과 엄마에게도 험하고 거친 말을 많이 했는데 나는 오랫동안 아버지를 미워했다. 아니 사춘기 시절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집안 분위기는 무겁고 공포스러웠다. 한 사람의 미성숙함은 여러 사람을 숨막히게 할 수 있다. 그러나 혈육을 증오했던 마음은 죄책감과 불안을 불러 왔다.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면서상담공부를 하게 된 이유도 이런 감정때문이었다. 고등학생이 감당할 수 없는 무게였다.
대학시절 공부는 하지 않고 술을 많이 마셨다. 억압된 마음을 풀지 못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계속 삶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부유했다. 그 밑바닥에는 언제나 아버지가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여러 번 울었다. 내가 작가를 이해해서가 아니었다. 흔히 하는 비루한 마음, 비교질이었다. 누가 지아작가만큼 괴로웠을까... 아버지가 빨치산이었지 나는 빨치산이 아닌데 내가 하고 싶었나 아버지가 하고 싶었지... 지난 시절은 공산주의에 가혹했는데 그녀는 한 등에 두 짐을 지고 어떻게 살았을까... 누가 그녀보다 더 아버지가 미웠을까... 그래도 그녀의 아버지는 누룽지를 긁어주고 노동으로 학교를 보내주었잖아, 아버지는 그것도 하지 않았잖아,,, 뭐 이런 생각들이 탁구공처럼 머릿속을 핑핑 날아다녔다.
그 울음은 생각을 멈추게 했다. 미움도 멈추게 했다. 묵진한 무언가가 느리게 발바닥 아래로 떨어져나갔다. 유한하고 짧은 삶, 부모와 자식이라는 천근같던 글레도 작은 점처럼 느껴졌다.
작가의 글에 기대어 주절주절 이런 글을 쓰면서 다시 눈물이 흐른다.
왜냐고?
나는 아이가 아니고 어른이 되었고 살아남았다. 외상을 입었지만 상처에서 빠져나왔으니까, 삶은 좋은 것과 나쁜 것들이 교차되는 그 무엇이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