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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리별 Jul 17. 2024

#51 '쓰기'라는 마법

고미숙의 <<읽고 쓴다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

이 책은 두 번 읽었다. 첫 번째는 '재미있다!'였고 재독 할 때는 내가 고민하던 문제의 해답 찾은 기분이었다. 고미숙 선생님^^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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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42

우리는 욕망하고, 해명하고, 해방하고, 자신을 알고자 애쓰고, 행동한다. 그리고 문득 동굴 속에서 그리스적 질문, 아폴론의 신탁을 받은 무녀의 질문을 듣는다. 너에게 이 삶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 답이 없는 질문을 평생 대면하는 것이다. 굳이 서두른다면 어떤 식으로든 대답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서두르는 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다. --- 우주적 차원을 획득한, 존재하는 내가 내쉬는 숨이다. 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늘에 구름이 한 점 지나간다. 참으로 아름다운 구름이다. (파스칼 샤보, <논 피니토:미완의 철학>)



p75

문명과 역사가 시작된 이래 인류는 무수한 전쟁을 겪었다. --- 전쟁을 할수록 제국은 팽창했고, 그 팽창된 제국을 지키기 위해선 또 전쟁을 해야 했다. 제국의 탄생과 더불어 부가 늘어났고 계급이 분화되었다. 이긴 자는 지배계급으로, 패배한 자는 하층민과 노예로. 그 사이를 잇는 이들은 중간계급으로. 전쟁이 많아질수록 계급도 정교하게 구획되었고, 어느 순간 그것은 천부적인 것으로 고착되었다. 태어날 때 이미 그렇게 정해졌다는 것이다. 카스트, 곧 신분제도가 탄생한 것이다. 물론 그 안에는 남성과 여성의 위계도 존재한다. 여성은 아이(생명)를 낳고 남성은 가치를 창조한다  - 원시 공동체를 지배한 이 아름다운 분업은 제국의 등장과 함께 가부장제와 남존여비라는 지독한 지배/예속의 관계로 재편성되었다. 신분제와 성차별. 이것은 모든 문명의 구조적 패턴이다.



p77

의식주가 풍요로워진 대신 생명력은 한없이 빈곤해졌고, 전염병을 퇴치한 대신 암, 치매, 우울증 같은 난치병들이 늘어나고 있고, 자유와 평등은 법과 제도의 영역에서나 가능할 뿐 사람들은 여전히 우열과 차별에 시달리며 서로 적대감을 키워 가고 있다. 그간의 역사에서 치른 희생 혹은 그 엄청난 발전에 비하면 참 초라한 성과 아닌가. 그렇다. 하지만 그 안에는 놀라운 비밀 하나가 숨어 있다. 모든 혁명의 성과에는 '책의 해방'이 있다는 사실이다.--- 엘리트와 대중 사이의 경계도 무색하다. 최고 수준의 연구자가 산출하는 지적 성과물을 누구나 접할 수 있고, 동시에 어떤 대중도 자신의 지성을 당당하게 세상에 펼칠 수 있다. 이런 디지털의 바다에선 어떤 금지도 불가능하다. 당연히 특정 집단이 독점, 조작하기는 더더욱 어렵다. 하늘의 은하수가 쏟아져 디지털의 바다를 유동하고 있다고나 할까.


 이것이 혁명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인류가 그 오랫동안 피 흘리며 쟁취하려고 했던 그 혁명, 문제는 선택이다. 이 책의 바다를 유영하면서 삶으로 다시 떠오를 것인가? 아니면 스마트폰이 선사하는 온갖 감각적 쾌락에 빠져 중독의 늪에 빠져들 것인가? 어느 쪽을 선택할지는 각자의 몫이다. 지금까지의 모든 혁명이 그러했듯이.



p86

이런 맥락을 이해한다면 자존감을 회복하는 길도 어렵지 않다. 자신을 외부와 단절시키는 것이 아니라 외부와 계속 연결, 확충해 가면 된다. 성공과 경쟁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존재의 심층적 차원에서 '초연결'을 시도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앞에서 말한 독서법이다. 내가 읽는 책이 곧 '나'자신임을 아는 것. 그렇게 나아가다 보면 내가 곧 세계가 되고 별이 되고 우주가 된다. 그 자체가 이미 힐링이다. 세상을 경쟁과 지배의 대상이 아니라 내 존재의 광대무변한 토대이자 배경으로 여기게 된다. 그 자율성 속에서 자존감이 충만해진다. 그것을 누리고 싶다면? 무엇이든 '읽을 수 있는' 신체가 되는 것, 모든 책 속에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것, 그것이면 충분하다.



p107

무엇 때문인가? 간단하다. 우리 시대 교육이 읽기와 쓰기의 동시성이라는 이치를 외면한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쓰기를 배제한 채 읽기만 하기 때문이다.  --- 글쓰기의 영역은 무궁하다. 존재와 세계, 몸과 우주, 사랑과 우정 등, 삶의 지도에 관한 모든 것이 다 해당한다. 왜 이 방향을 설정하지 않는가? 그저 취미나 위안, 소일거리 정도에 묶어 둔단 말인가? 이것이야말로 계급적 차별이 아닌가?


읽으면 써야 한다. 들으면 전해야 한다. 공부도, 학습도, 지성도 최종심급은 글쓰기다. 다른 무엇일 수 없다. 그런데 왜 이런 분할선을 방치하는가? 자본의 은밀한 전략인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p110

게다가 우리의 뇌(특히 좌뇌)는 늘상 재잘거린다. 한순간도 쉬지 않고 뭔가를 떠들어 댄다. 그 생각들은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다. 천지분간 못하고 사방으로 흩어진다. 하여, 우리는 필연적으로 이 산만함에 맞서는 훈련을 해야 한다. 수렴과 집중이 그것이다. 타오르는 욕망의 불꽃을 제어하여 수숭화강(몸이 균형을 잡기 위해선 신장의 물은 올라가고 심장의 물은 올라가고 심장의 불은 내려가야 한다는 양생의 원리)을 이루고, 욕망과 능력이 마주치는 포인트를 찾아야 하고, 뇌의 재잘거림을 멈추게 하는 마음훈련을 해야 한다. 이건 선택사항이 아니다. 그저 평범한 생을 영위하기 위해서도 수렴과 집중은 필수다.


 그래서 '글쓰기로 수련하기'다. 읽기도 수렴과 집중의 과정이지만 강도가 좀 약하다. 책을 읽고 있는데도 생각이 흩어지고 산만해지는 일은 허다하다. 또 집중적으로 읽는다 해도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 그 많은 언어와 문장들은 허공에 흩어져 버린다. 그래서 사람들은 냉소한다. 어차피 다 잊어버릴 건데 뭣 땜에 읽냐고? 정보를 습득하기 위해서 읽는 것이 아니다. 읽는 행위 자체가 카오스에 차서를 부여하는 행위다. 사방으로 흩어지는 정신의 사막에 지도를 그리는 행위다. 거기에 좀더 임팩트를 부여하려면 써야 한다. 쓰기는 읽기의 연장선이자 반전이며 도약이다.



p116

글쓰기를 배우러 왔다가 글쓰기가 힘들다고 포기하는 이들한테 물었다. 글을 포기한 대신 뭘 하느냐고? 게임, 쇼핑, 야동, 웹툰, 미드, 온갖 중독적 행위에 골몰한다. 본인들도 안다. 그게 자존감을 한없이 떨어뜨린다는 것을. 멈추는 것이 두려워 계속 거기에 매달리고 있다는 것을. 더 중요한 건 중독에 빠진 그 순간 뇌와 손과 혀는 얼어붙어 버린다. 뉴런들은 연결되지 못하고 혀는 욕설로 범벅된 감탄사와 광기 어린 말들을 토해 낸다. 혀가 먼저 미쳐 버리는 것이다. 손은? 팔이 아프도록 클릭을 해댄다. 팔목이 굳고 뒷목이 뻣뻣해지고 하체에는 피가 통하지 않는다. 이렇게 살면 당연히 아프다. 아프고 괴롭다. 괴롭고 외롭다. 당연하지 않은가. 존재의 본성에서 아득히 멀어졌으니, 어찌 아프고 괴롭지 않을 수 있으랴



p117

아기들이 처음 두 발로 서서 걸을 때의 감격을 아는가. 내가 아는 한 꼬마는 걸음마에 성공한 날 밤잠을 설쳤다고 한다. 엄마의 증언에 따르면, 밤에 자다가 벌떡 일어나서 다시 걸어 보더라는 것. 자신도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걸을 수 있다니! 그와 마찬가지다. 자신만의 언어와 문장을 만들어 낼 때의 그 감격을 대체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다만 '신통하고 방통하다'고 할 밖엔!



p135

황홀경에 이르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중독에서 약물로. 이것은 죽음충동의 코스다. 존 레논이 그랬다던가. 세상은 약물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의 것이라고. 맨 정신으론 살기 어렵다는 뜻인가? 약물의 유혹이 얼마나 심했으면 저런 말을 했을까 싶다. 죽음충동이 아닌 생의 약동으로 황홀경에 도달하려면? 지성과 영성을 통해 자아를 해체하는 코스밖엔 없다. 근데, 그게 즐겁다고? 당연하다. 쾌감이 하나의 감각만이 극대화되는 것이라면, 이때의 기쁨은 온 존재에 퍼져 나가는 충만감이다. 그것을 일러 지복이라 부른다. 거기에는 늘 천진난만한 웃음소리가 따라다닌다.



p152

그리고 배움이란 자신과의 부단한 대결이다. 자신을 넘어 다른 존재가 되는 것, 그것이 곧 길이요 도다. 다산과 연암이 지성과 글쓰기를  통해 보여 준 그 길을 조용필은 노래를 통해 내게 들려주고 있다.



p158

인생 또한 다르지 않다.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질문하는 순간 우리는 무명의 깊은 수렁을 발견한다. 아, 나는 나를 모르는구나! 삶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채 살아왔구나! 하지만 이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곧 구원이다. 앎은 무지를 알아차리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법이니까. 그래서 가장 위험한 것이 질문은 없고 이미 답이 정해져 있다고 여기는 태도다.



p161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지점에서 환기해야 할 사항 하나. 이 모든 과정의 베이스는 배움과 학습, 곧 앎의 본능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 이런 실험과 비전의 중심에는 책이 있다. 다른 것으로는 불가능하다. 춤, 운동, 헬스, 요가, 등산 등 다양한 레저와 활동이 있지만 그것들은 대개 비슷한 계층, 유사한 세대에 갇히게 된다. --- 거기에선 우정의 연대도 지적 성숙도 불가능한 까닭이다. 이 없는 우정은 지루하다. 우정이 없는 지성은 썰렁하다. 고로, 우정의 기쁨, 지성의 파토스는 함께 간다.


 그러니 책을 통해 인맥을 재구성하라. 오직 책만이, 책에 당신 지혜와 비전만이 세대의 장벽을 가로질러 서로를 벗으로 만들어 준다. 책의 저력을 믿고 감히 시도해 보라! 트랜스 제너레이션을 향한 소박하지만 힘찬 한 걸음을!



p171


앞으로 어떤 변화가 올지 모르지만 이런 식의 유동성이 더더욱 심화될 것만은 분명하다. 이런 흐름에 적응하려면 무엇보다 자의식을 버리고 경쾌하게 사는 법을 익혀야 한다.--- 무작정 노는 일만큼 지겨운 것도 없고, 즐거움도 극에 이르면 끔찍하게 공허해지는 법이다. 그건 윤리가 아닌, 생리적 법칙이다. 그러면 자연히 존재의 무게중심을 후자의 방향으로 옮기게 될 것이다.



p192

우리는 병들고 정신줄 놓치는 걸 엄청 두려워하는데 그걸 예방할 방법은 없어요. 돈으로도 약으로도 되지 않습니다. 그저 계속 몸과 마음을 훈련하는 것 말고는 달리 길이 없어요. 그 훈련의 핵심이 이거라는 거죠. 리듬을 타는 것. 오늘 해야 할 일들의 차서를 잡아서 그 리듬에 맞춰 해나가는 것. 리듬을 타지 못하면 모든 게 어그러집니다. 관계도 활동도. 그러면 심신이 엄청 스트레스를 받죠. 그게 번뇌를 일으키고 질병을 유발하고. 그러다 보면 자포자기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엔트로피 법칙에 항복해 버리는 거죠. 글쓰기는 거기에 저항하는 최고의 실천입니다.



p239

고민은 많이 하죠. 취직, 연애, 쇼핑, 게임, 가족 등등. 그 중에서 존재의 본질은 뭐지, 세계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지를 고민하는 시간이 하루에 몇 시간, 아니 몇 분이나 되세요? 전혀 안 하시죠. 대신 전문가들이 하는 걸 구경을 해요. 구경하고 적당히 들으면서 감상적 논평을 하죠. 그런 거 일러 소외라고 합니다. 철학이 인간의 본성임을 망각한 데서 온 소외. 그래서 이번 글쓰기 강의 제목을 '에세이 쓰기'가 아니라 '에세이-하라'고 한 것도 그걸 염두에 둔 겁니다. 그냥 에세이라는 장르적 글쓰기를 하는 게 아니라, 에세이를 쓰면서 철학을 하라, 스스로 철학하는 존재임을 자각하라, 뭐 이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p263

현대인은 특히나 자의식의 비만이 심각한 수준이라 <축의 시대>의 저자 카렌 암스트롱은 영적 탐구란 '자아를 굶기는 것'이라고 정의하기도 했습니다. 굶긴다는 표현이 지나치다면, 자의식에서 조금씩 벗어나는 훈련, 그게 바로 '에세이-하라'의 핵심입니다. 이런 글쓰기가 아니면 언제 그런 요상하고 괴상한 자기자신과 마주치겠으며, 그런 자신과 대결을 해보겠습니까? 괴로울수록 즐기세요. 은근 재미집니다.



p274

이 길 위에 순례자의 길도 있어요. B.C.500년쯤 되면 새로운 비전이 탄생을 해요. 동양에서도 공자, 노자, 부처가 등장하고, 서양도 소크라테스라는 현자가 출현하죠. 그래서 이 세대를 묶어서 '축의 시대'라고 명명하는 겁니다. 그 이전에는 제우스를 중심으로 한 다신교가 삶의 축이었는데, 그게 점차 힘을 잃으면서 드디어 철학이 등장을 한 거죠. 지중해의 장점은 뭐냐면 저 다양한 섬만큼의 다양한 사상이 있다는 겁니다.



P296

'우리가 왜 인문학을 해야 돼?' 또는 '고전을 왜 읽어야 돼?' 이런 질문만큼 어리석은 게 없어요. 사유하지 않으면 삶을 지탱하기도, 지속하기도 어렵습니다. 고전의 지혜야말로 일용할 양식이에요. 그 양식이 있을 때 길 위에 나설 수 있는 거고요. 길은 사건의 현장이죠. 늘 온갖 사건들이 생겨나고 소멸합니다. 이 사건들 속에서 어떤 삶을 만들어 낼 것인가? 그것을 결정하는 키는 바로 사유의 내공에 달려 있습니다.






 '읽고 쓴다.'


 지금은 평범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1919년생이신 우리 할머니에게는 금지된 일이었다. 엄마에게도 가볍게 한글 정도만 허락되었다. 엄마는 이제 고된 가사노동과 제사에서 해방되었다.


"엄마, 공부하러 가요. 영어 공부할래요?"


"공부는 무슨 ..."


하시고 딸기밭에 딸기 따러 가신다. 재미있다고 하신다.


'엄마, 세상에는 더 재미있는 게 많요.' 


공부하지 못한 시간들이, 가사노동과 남존여비에 갇힌 시간들이 엄마를 둘러싸버렸다. 아버지는 화가 나면 너는 알파벳도 모르냐고 엄마를 무시하곤 했다.


엄마, 다음 생에는 내 딸로 태어나요. 좋은 데 많이 데려가 주고 공부도 원껏 시켜드릴게요.



#고미숙#읽고 쓴다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 #욕망#제국#존재의 심층#인문학


#고전#축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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