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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리별 Jul 17. 2024

 #70 무기력, 분노, 공포 그리고 용기

에리히 프롬의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 책에서 가져왔습니다>



자신의 역할을 완벽하게 연기하면 모두가 완벽한 진짜 삶을 산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주변 사람들 및 자연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 관계를 맺지 않는 사람은 미친 사람이다.  광기를 바로 그렇게 정의할 수 있다. 광기를 바로 그렇게 정의할 수 있다. 광기란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의 상태이다.


세기의 질병, 즉 인생의 무의미함은 인간이 사물로 변한 데 그 원인이 있다.


우리는 영원한 소비자이다. 우리는 담배, 술, 강연, 책, 영화, 인간을 소비한다.




인간을 자기 목적으로 보는 사람들과, 인간을 자연의 다른 모든 사물처럼 다른 목적  - 국가, 가족, 소유, 권력  등 - 의 수단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구분해야 한다. 위대한 사상가들은 대부분 전자이다. 그들 모두가 인간에게는 의식적으로 체험하고 감탄하며 자신의 실존적 분열을 해소하는 최적의 방법인 가치와 목표를 발견하는 능력이 있다고 보았다.


우리는 존재를 추구하지 않고 소유를 추구한다. 많은 경우에서 소유가 존재보다 더 강한 현실성을 갖는다. 자신을 소유자로 소외시키는 우리는 우리의 소유물일 뿐 인간 인격으로서 자신이 되기를 중단하였다.


쾌락주의자의 슬픔은 유일한 존재가 되고 싶지만 결국에는 별것 아닌 사람이 되고 마는 '세인'의 슬픔이다.


전쟁을 피하고 싶다면 해결책은 단 하나, 내면의 평화뿐이다.


우리 각자는 사회가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타자의 존재 역시 우리 각 개인의 일부이기에 사회가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은 본성상 타인을 위한 존재이다.


실제의 '공동체'를 이루려면 이 모든 장애와 불투명성을 극복하고 자신의 자아를 넘어 타인의 자아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는 나와 너와 우리를 껴안는 책임감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하지만 의식적 헌신이 곧 자신의 사적 공간을 포기한다거나 타인의 사적 공간을 침해한다는 뜻은 아니다


약간 자의적이지만 거부감과 적대감 같은 감정들이 아주 일찍부터 억압된다는 사실에서 한 가지 예를 찾을 수 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주변 세계와의 갈등을 통해 일정 정도의 적대감과 반항심을 표출한다. 주변 세계가 아이의 팽창 욕구를 저지하려 하고, 아이들은 보통 - 더 힘이 약한 존재이기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


감정의  터부화 과정에서 현대 정신의 이중의 역할을 한다. 한편으로는 정신의학의 대표자 격인 프로이트가 인간  정신의 합목적적이고 합리적인 특성이라는 허구를 깨고 인간 열정의 심연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길을 닦았다.


하지만 한 번씩 이런 악착같은 노력을 멈출 때면 의문이 밀려들지도 모른다. "정말로 그 자리에 오르면, 더 좋은 차를 사면, 이 여행을 할 수 있으면 그다음에는? 이 모든 것이 다 무슨 소용일가? 이 모든 것을 원하는 사람이 정말 나일까? 행복해질 것이라고 다들 말하지만 이루고 나면 허망해질 목표를 좇아 달리는 것은 아닐까?" 


이 모두는 진리의 관념이 모호하다는 증거이다. 현대인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착각 속에 살지만 실제로는 타인의 관점에서 볼 때 그가 원하는 게 마땅한 것만 원한다. 그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는 자신이 실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가 -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듯 -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우쳐야 한다. 


우리는 순응주의자가 되었지만 스스로가 의지를 가진 개인이라는 착각 속에서 산다. --- 근본적으로 자아가 너무 허약해졌기 때문에 인간은 무력한 느낌, 극도의 불안감에 시달린다. --- 자아의 상실은 타인에게 순응해야 할 필요를 더욱 키웠지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깊은 회의를 낳는다. 나라는 존재가 타인이 나에게 기대하는 존재에 불과하다면 나는 과연 누구인가? --- 개인의 정제성은 데카르트 이후 현대 철학의 주요 문제이다. 


오늘날의 인간은 삶에 굶주려 있다. 하지만 순응주의자이기에 삶을 자발적으로 경험할 수 없고, 자극과 스릴의 형태를 띤 대용품을 움켜잡는다. 술과 스포츠가 주는 스릴이나 스크린의 허구적 인물을 통해 경험하는 스릴 말이다.


현대인이 느끼는 고립과 무기력의 감정은 인간관계를 통해 더 강화된다. 인간은 서로를 조종하고 서로를 목적을 위한 도구로 취급하며 서로에게 무관심하다. 모든 개인적 관계와 사회적 관계에서 시장 법칙이 통한다. --- 서로에게서 이익을 취한다는 사실만 빼면 서로에게 무관심하다.


한 인간이 제공할 수 있는 속성에 대해 수요가 없을 경우 그 속성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팔리지 않는 상품은 사용가치가 있다고 해도 무가치한 것과 같은 이치다. 따라서 '자신감', '자존감' 역시 타인들이 그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는지를 보여주는 암시에 불과하다. 인기나 시장에서의 성공에 개의치 않고 자신의 가치를 확신하는 것은 '그'가 아니다. 수요가 있는 경우 그는 '누군가'이지만 인기가 없으면 그 누구도 아니다. 이렇듯 인격의 성공 여부에 자존감이 달려 있으므로 현대인에게 인기는 엄청난 의미를 갖는다.   


물론 우리 중에도 자립적인 사람들이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자신이 자립적이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더 나아가 위험한 생각이다.


비판적 사고의 억압은 아주 어릴 때부터 시작된다. 다섯 살만 되어도 아이는 벌써 엄마의 거짓을 알아챈다. 아이는 모순을 느낀다. 정의와 진리를 바라는 그의 감정이 상처를 입는다.


인간의 자긍심은 그의 성공에 달려 있다. 그가 이윤을 남기고 자신을 판매할 수 있느냐,--- 그의 몸과 정신과 영혼은 그의 자산이며 그의 삶의 과제는 이것을 유익하게 투자하여 이익을 거두는 것이다. 친절과 예의, 관용 같은 인간적 특성들은 상품이 되며, 인력시장에서 더 높은 가격을 받게 해주는 '인성 꾸러미'의 차변 항목이 된다. 


사물이 완성되면 인간은 그 사물의 주인이 아니라 시종이 된듯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물질세계 전체가 인간 삶의 방향과 속도를 지정하는 거대한 기계의 괴물이 된다. 인간에게 봉사하고 행복을 선서하기 위해 인간의 손으로 탄생시킨 작품이 인간을 소외시키는 시계가 되고, 현대인은 그 세계에 비굴하고 무기력하게 복종한다. 


증상 신경증이건 성격 신경증이건 모든 신경증의 중요한 특징은 한 사람이 특정한 기능을 하지 못하며, 마땅히 할 수 있어야 하는 일을 할 수 없고, 이런 무능력이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약하고 무력하다는 깊은 확신에서 나온다는 점이다. 


신경증 환자들에게서 나타나는 무력감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어떤 것에도 영향을 미칠 수 없고, 어떤 것도 움직일 수 없으며 나의 의지로는 외부 세계나 나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다. 아무도 나를 진지하게 대우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나는 공기와 같다. 


무력감의 또 다른 중요한 결과는 공격에 맞서 자신을 방어하지 못하는 무능력이다. 그 공격이 신체적 공격일 경우 약간 특수한 신체적 무력감을 느끼기도 한다. 종종 위험이 닥쳤는데 자신의 신체적 힘을 전혀 사용할 수 없어서 마비된 것처럼 꼼작 못하고 저항할 생각 자체를 못하는 것이다. 


보통은 자신의 소망이 있을 자리를, 타인이 자신에게 무엇을 바라는지에 대한 고민이 차지한다. 


당사자는 정말로 몸이 아프고, 상사를 도발하여 실제로 해고당하며, 아내와 언쟁을 시작하여 하루 종일 집안 분위기를 불편하게 만든다. 이 모든 것이 성공할 경우, 견딜 수 없는 외부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자신의 무력감은 타당하며, 지극히 정당하다고 느낀다.


이 경우 무력감은 과보상 행동과 은폐 목적의 합리화로 대체된다. 과보상의 가장 흔한 경우가 분주함이다. 깊은 무력감을 억압한 사람들이 특별히 활동적이고 분주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과도한 단체 활동'이나 다른 사람에 대한 쉼 없는 걱정, 카드 게임이나 단골 술집에서 장시간 환담을 나누는 것 또한 다른 형태의 가짜 활력이다. 


무력감에 대한 조금 더 과격한 반응으로는 상황을 가리지 않는 통제와 지휘의 노력을 꼽을 수 있다. 많은 경우 이런 소망은 순수하게 상상에 국한된다. --- 그런 경우 그는 만나는 모든 사람보다 자신이 더 우월하리라는 기대감을 가끔씩 인식할 것이고, 이런 기대마저 억압당하면 사람들을 만날 때 분노의 반응을 보일 것이다. 이 분노 반응마저 억압되면 자기보다 잘난 사람에게 약간의 거부감과 수줍음을 보이는 것 말고는 전혀 눈에 띄는 점이 없다. 


분노의 결과는 항상 공표다. 분노가 억압될수록 공포도 커진다. 그 원인인 복잡한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여기에서 상세히 다룰 수 없지만 자신의 분노를 타인에게 투영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자기 분노를 확실히 억압하기 위해 '내가 남들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니라 남들이 나한테 화가 났다'라고 표현될 법한 감정이 탄생한다. 


정신분석을 진행하면 무기력과 그것을 은폐하는 다양한 형태, 무기력을 극복하려는 시도들을 관찰할 수 있다. 이런 환자들의 다수는 자신은 이미 너무 나이가 많고, 신경증이 가족 내력이며, 장기적으로 치료를 받을 시간이 없기 때문에 절대 변할 수 없다고 되풀이한다. 또 항상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 온갖 변명을 늘어놓는다. 


무력감처럼 깊이 자리 잡은 강렬한 감정은 아주 어린 시절의 체험과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예상하는 것이 당연하다. --- 어른은 근본적으로 아이를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을 사실대로 본다는 것은 그를 투영 없이, 왜곡 없이 객관적으로 본다는 뜻이며 이는 투영과 왜곡을 낳는 자기 내부의 신경증적 '악덕'을 극복한다는 의미이다. 내적 현실과 외적 현실을 인식하기 위해 완벽하게 각성한다는 의미이다. 그런 내면의 성숙에 도달한 사람만이, 자신의 투영과 왜곡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이는 사람만이 창조적으로 살 것이다. 


그는 자신이 생각한다고 상상하지만 사실은 '그것이 내 안에서 생각한다'는 표현이 더 옳을 것이다. 그는 레코드플레이어와 같은 착각을 한다. --- 생각에 해당되는 내용은 감정에도 해당된다.


(진짜 삶)의 또 한 가지 조건은 회피하지 않고 양극성에서 나오는 갈등과 긴장을 받아들이는 능력이다. 이런 생각은 갈등은 최대한 피해야 한다는 요즘 사람들의 생각과 완전히 반대된다. --- 갈등은 감탄의 원천이며, 자신의 힘과 흔히 '성격'이라 부르는 것을 개발하는 원천이다. 



인간은 자궁으로 돌아가고 싶은 소망과 완전히 새로 태어나고 싶은 소망 사이를 항상 오간다, 모든 탄생의 행위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놓아버릴 용기, 자궁을 포기하고 엄마의 가슴과 품을 떠나며 엄마의 손을 놓고 마침내 모든 안전을 버리고 단 하나, 즉 사물을 실제로 인식하고 그것에 응답하는 자신의 힘만을 믿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태어날 준비 - 모든 안전과 착각을 포기할 용기 - 는 용기와 믿음을 필요로 한다. 안전을 포기할 용기, 타인과 달라지겠다는 용기, 고립을 참고 견디겠다는 용기다. 




나는 누구일까? 


'엄마, 아내, 딸, 주부, 누구의 친구, 책을 좋아한다, 요가를 한다, 어디에 살고 있다.'

이런 설명 없이 '나'라는 존재를 표현할 수 있는가? 어떻게 이야기할까 생각해 본다. 자꾸자꾸 생각하다 보면 '나'라고 할 것이 없다는 느낌이 밀려온다. 그런데, 이 결론에 '그렇구나'하고 무릎을 치면서 동의하기가 어렵다. 


다시 자꾸자꾸 생각해 본다. 이 순간 느끼는 감각, 그에 따른 기분, 생각이 있다. 그것이 나일까?


'아니다'라는 생각이 든다. 동일한 상황에서도 감각은 다르다. 감정도 생각도 매 순간 다르게 느껴진다.


나라고 할 것은 없지만 순간을 느끼는 그 무엇은 있다. 그걸 뭐라고 불러야 할지 잘 모르겠다. 지금 이 순간을 잘 느끼고 흘려보내고, 또다시 잘 느끼고 흘려보낸다.


내 안에는 5살의 나와 20살의 나가 있고 동시에 30살, 40살의 나도 있다. 아직 오지 않은 60, 혹은 70의 나도 있다. 그 어떤 것을 경험하는 무엇이 있을 뿐 나는 아무것도 어떤 것도 아니라는 느낌이 든다. 


이제는 그 느낌이 그다지 슬프거나 괴롭지 않아서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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