⑧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뚜렷해진 순간

by 삶탐구소

교수님들이나 친구들에게 스타트업에서 일하고 있다고 말해오다가 바뀐 내 상황을 털어놓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별수 있나. 당장 막막해진 나는 당시 학교에 처음 부임하셨던 교수님을 떠올렸다.


‘도시탐방’이라는 수업을 들으며 가까워졌고, 도시재생 사례지를 답사하는 수업 특성상 이동하며 비교적 캐주얼하게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많았다. 조심스럽게 내 상황을 말씀드리게 되었는데

“어, 한 번 연구실로 와.” 라고 쿨하게 말씀해주셨다.


그 즈음,

앞으로 하고 싶다고 생각해왔던 일을 이미 하고 있는 사람들을 한 컨퍼런스에서 만나게 된다.

이미 관심이 많았던 윤주선 AURI 연구원님(현재는 교수님이 되셨다)과 모종린 교수님이 참여한 자리였다.


윤주선 연구위원은 로컬과 도시재생 스타트업을 연결해 민관협력 모델을 만들어가자는 얘기를, 모종린 교수는 지역경제의 관점에서 라이프스타일을 도시의 핵심 경쟁력으로 이야기했는데 고개를 연신 끄덕이게 했던 건 지역 하나하나가 살아나기 위해서는 각 도시마다 고유한 라이프스타일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 흐름 속에서 들은 야마자키 마츠히로의 강의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포틀랜드가 어떻게 라이프스타일과 지속가능성이 공존하는 도시가 되었는지, 노상의 카페에 앉아 있는 사람과 거리의 보행자가 어떻게 도시의 ‘배우’가 되어

공간을 더 재미있게 만드는지를 설명했다.

그리고 그 장면을 가능하게 한 것이 하드웨어적인 어반 디자인이라는 점을 짚어주었다.


그렇게 번뜩 하고 내가 하고 싶던 일이 분명해졌다.

지역의 커뮤니티와 라이프스타일을 하드웨어적으로 뒷받침하는 일. 눈에 보이지 않던 관계와 삶의 방식을 사람들 눈에 보이는 것으로 만드는 도시설계.


나는 도시설계를 로컬 커뮤니티의 라이프스타일에서 출발하는 개념으로 바라보고 싶었다.

모든 동네는 각기 다른 삶의 방식을 가지고 있고, 그 삶의 방식이 고스란히 그 동네만의 도시설계로 담기는 일을 하고 싶다.


이 일을 실제로 하고 있는 사람을 직접 보고 나서야

이 일이 막연한 상상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서 그 깨달음의 자리가 정말 감사했다.


그렇게 하고 싶은 건 뚜렷해졌지만 당장 뭘 해야 할지는 모르겠는 상태로 교수님과 상담을 하게 된 것이다.


원래 나는 엔지니어링 회사에 지원할 계획이었다. 교수님은 먼저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여쭤보셨다.


작은 단위에서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는 설계를 하고 싶었다. 실시간으로 사람들의 행동을 파악하고, 그렇게 얻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계속 그들에게 필요한 설계를 하는 일. 그 중심에는 라이프스타일이 있었다. 각 지역마다의 라이프스타일에 따라 다른 이용형태가 있을 것이고 최종적으로 라이프스타일 구심점이 되는 앵커센터 역할을 하는 곳을 도시마다 만들고 싶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붕 뜬 소리이지만 그때의 나는 사뭇 진지했다.


교수님은 내 말을 듣고는 도시재생이네, 라고 하셨다. 나는 이 일련의 일을 도시재생이라고 정의하고 싶지 않았지만 잘 아는 교수님에게 그렇게 들렸으면 도시재생에 가까운 일인 거겠지.


그리고 대형 엔지니어링 회사에서는 내가 말한 방식의 일을 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 본 전공이 중문과인 내가 설계 베이스가 약하다는 점도 솔직하게 짚어주셨다.


그러면서 이런 말씀도 덧붙이셨다.

적어도 내가 던진 질문에서는 ‘무엇을 하고 싶은지’가 분명히 보여서 해줄 수 있는 이야기가 있어 다행이라고.


그리고 대학원 진학을 제안하셨다.

지금 학교에서 진행 중인 캠퍼스타운 프로젝트에

실무진으로 참여하면서 커뮤니티와 설계를 현장에서 배우고, 석사 과정은 전액 장학금으로 다닐 수 있다는 것. 어차피 엔지니어링사의 하반기 공채까지 1년을 기다리는데 그 기간을 공백기로 두느니 도시 분야에서는 석사를 가게 되니 이 시기를 대학원에서 보내며 다음 단계를 준비하는 것도 방법이라는 것이었다.


대학원에 대한 생각은 늘 마음 한편에 있었다.

언젠가는 갈 거라고 생각했고, 엔지니어링에서 경험을 쌓은 뒤 중국어 전공을 살려 싱가포르나 홍콩으로 가는 그림도 그려본 적이 있었다.

당장이 아니었던 건 돈이 들기도 했고, 좀 더 넓은 곳에서 배우고 싶다는 마음에서였다.


갑작스럽게 생각지 않았던 대학원을 선택지로 마주한 나는 여러 글을 찾아보고 여러 조언을 들었다.



다음 글에서는 대학원을 고민하던 당시의 내 상황과 조건을 하나씩 놓고,

가장 쉬운 회피를 택하지 않기 위해 나름대로 냉정하게 판단하려 했던 시간을 이야기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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