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목요일, 전 직장의 새로운 법인 출범식을 위해 사회를 봤다.
성과는 창대했지만 대접은 시궁창이었다.
전 직장 대표님 전화 한 통으로 3주 동안 사회를 보기 위한 준비로 시간을 쓸 줄 누가 알았는가?
이번 일로 다시는 대표님과 엮이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 그는 그저, 값싼 노동력이 필요했던 것뿐이라는 결론이 났기 때문이다.
약 한 달 전, 그의 전화가 왔을 때 나도 모르게 행사 사회를 수락했다. 이전에 기업행사 사회를 본 적이 한 번도 없었음에도, 뭐 나도 당장 돈이 필요하기도 했고... 2시간짜리 행사라길래 그렇게 큰 행사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얼결에 수락했다.
대표님과 통화가 끝나자마자 경영지원팀 이사님께 전화가 왔다. 이게 무슨 일이냐고 그러셨다. 이제는 대표님의 돌발행동이 더 이상 놀랍지도 않다고 하시면서, 다음 주에는 미팅이 있고, 그다음 주에는 리허설이란다.
뭔가 쎄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미팅에 사회자가 가야 하는 이유가 있나?' 속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행사 관련 자료를 받고 미팅에 갔을 때, 행사날 저녁식사까지 사회자가 클로징 멘트를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2시간짜리 행사가 갑자기 4시간 이상짜리 행사가 되었다. 쎄한 느낌이 점점 더 들기 시작했다. 이 미팅에 있는 나 자신이 도대체 왜 이 미팅까지 참여하고 있는 것인지도 의문스러웠는데... 점점 내가 해야 할 일들이 추가되는 느낌... 그것도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하듯이.
대본도 내가 준비해야 했다. 이 날 미팅가기 전 크몽에서 대략적인 행사 사회비용이 얼마인지 알아보고 가긴 했는데, 보통 20-30만 원부터 시작했다. 난 전문사회자가 아니니, 그것보단 작게 비용을 책정해야 할 것 같았다. (물론, 거기엔 미팅이나 리허설 명목은 없었던 것 같지만!) 그리고 전 직장 직원인 것보다 대표님 지인 명분으로 더 작은 비용을 받아야겠지?라고 생각했다.
내가 내린 결론은, 미팅과 리허설, 행사까지 총 3일 출근(?)하는 명목으로 최저선으로 50만 원으로 염두했다. 경영지원 이사님께 정산 문의를 드리니, 얼마 생각하냐고 역질문을 하셨다. 나는 매우 순진하게도 50만 원이라고 단숨에 말씀드렸다. 여유로운 표정으로 "그것보단 더 챙겨드릴게요."라고 하셨다.
다음 주 리허설 때, 오전에 모인다고 하길래 서울에서 동탄까지 대중교통으로 이동하는 게 부담스럽다고 하니 전날 호텔 잡아서 자라고 하셨기도 했다. 그것도 비용에 넣어주겠다고. 행사 당일에 메이크업하고 갔더니, 메이크업까지 했냐면서 "그것도 비용에 넣어주어야겠네?"라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진실로 많이 주시는 줄 알았다.
아무쪼록 행사 준비하느라 배우이신 언니한테 2번 레슨을 받았다. 그리고 영어 통역도 필요하다고 하여서, 한동안 영어를 너무 안 했던 터라 외국인 친구도 2번 만났다. 한 번은 밥 사주면서 프리토킹하고, 마지막 한 번은 행사 전날 밤늦게 만나 통역 스크립트를 읽어보았다.
나름의 준비들을 이것저것 많이 했다. 내가 이 행사를 수락했던 전제 조건은 단 1가지였다. 내가 이제 차가 없으니, 대표님과 판교사무실에서 만나서 동탄으로 함께 이동하는 것.
시간이 흐르면서 약간 불안한 마음이 들어서 행사 전 주말에 대표님께 연락했다. '저랑 판교에서 만나서 이동하기로 했던 것 기억하시죠?'라고 했더니, '당근!'이라면서 '동탄에서 만나서 행사장으로 같이 이동합시다!'라는 것이다.
순간 내가 한국어를 잘 못 읽고 있는 것인지 의심했다. 기억하신다면서 판교가 아니라 동탄에서 행사장으로 함께 이동하자고? 뭔 말인지? 동탄에서 일찍 만나서 그날 행사의 주인공과 같은 대만업체와 함께 인사도 나누고, 점심 먹자고 하신다. 내가 여전히 직원이었다면 대만업체와의 단독미팅이 대단히 큰 의미겠지만, 지금은 직원이 아닌데 굳이 내가 그래야 하는 이유가 무언지 이해가 안 됐다.
더 따지고 들기가 그래서 점심은 몇 시에 먹냐니까 12시에 보자 신다. 이제 더 이상 변경 없었으면 좋겠다 하고 대화를 끝냈다. 그리고 행사 전날 경영지원 이사님이 내일 몇 시에 사무실 오는지 물으셨다. 12시에 대표님과 식사하기로 했으니 그거 끝나고 너무 늦을 것 같으면 따로 행사장으로 택시 타고 이동하겠다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자꾸 자기하고 같이 가잔다. 이분이 웬일로 나를 이렇게 붙잡나 싶어서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행사날이 되었다. 메이크업받고 있는데 9시경에 이사님께 전화가 왔다. 대표님이 나랑 식사 못할 것 같으니 대신 맛있는 거 사주라고 하셨다고. "근데 왜 대표님이 아니라 이사님께서 연락을 주셔요?"라고 말씀드렸다. 모르겠단다. 그리고 11시 반까지 올 수 있냐고 하신다. 대표님과 12시에 만나기로 했어서 그렇게 계산했기 때문에 11시 반까지는 갈 수 있을지 미지수다라고 말씀드렸다. "어? 대표님은 11시에 만나기로 했다고 하시던데."란다.
대체 대표님은 나와 왜 굳이 약속을 정하신 거고, 당일 취소를 다른 분 통해 전하시는 것인지 열불이 났다. 작년 12월에도 나와 만나기로 한 날, 상장준비 위해 만난 투자은행 지점장과 함께 만난 것도 생각났다. 약속 전날 일정 재확인했을 때, 그분들과 함께 만난다 하시길래 그럼 나는 다른 날 만나도 되니 다음에 보자고 말씀드렸었다. 굳이 굳이 같이 봐도 된다고 하셔서 같이 봤다.
은행지점장도 도대체 이 전 직원은 왜 여기 있는 것인가 의아하셨을 것이다. 나도 대체 내가 왜 여기 있는지 계속 의아했다. 함께 미팅하고 점심식사까지 했다. 이게 무슨 조합인지 지금도 이해가 안 간다. 그날 얼결에 이중약속이 되어 함께 만난 것도, 내가 만약 직원이었다면 뭔가 회사의 극비를 알게 된 것이라 핵심인물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을 텐데 난 이미 퇴사한 '전 직원'이 아닌가. 내가 왜 내 시간에 이 회사의 이런 부분까지 함께 해야 하는가?
이번 행사도 이 회사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행사였다. 산업 관련 중요한 분들은 다 오신 것 같다. 그렇게 큰 일을 전화 한 통으로 시켜놓고, 내가 수락한 단 한 가지의 조건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메이크업받는 순간부터 뭔지 모를 이유로 화가 치밀어 올랐다. 기만당한 느낌이었나? 너무 성질이 났다. 이대로 행사장에도 가기 싫었다. 나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건가 싶었다. 아침 일찍부터 나와서 메이크업받고 있다니. 불편한 신발 신고, 추운 원피스를 입고 1시간 걸려서 메이크업샵 왔는데! 지난 3주 동안 대본 쓰고 레슨 받고 연습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는 '최선'을 다한 것 같은데. 이 분은 나를 이런 식으로 대접해주시는구나 싶었다. 일정 변경은 일쑤고, 당일 취소 때에도 직접 연락이 아닌 우회하는 방향으로. 아주 당연하게. 대표란 원래 이런 것인가? 이 감정상태로는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서 대표님께 어느 정도 실망감을 표현하기로 했다. 그랬더니, "네! 모두 열심히 해주고 계시니 화이팅해주세요!"라는 동문서답이 왔다. 이번에는 인간적으로 실망했다. 왜냐하면 난 더 이상 '직원'이 아니기 때문에. 대표님과 지인이란 이유로 이 행사 사회를 수락했던 것이기 때문에.
사회는 뭐. 너무나도 잘했다. 아마추어가 프로처럼 한다는 식의 칭찬도 받았고, 아예 모르는 분께도 칭찬 인사를 받았다. 그날 행사의 주요 고객이었던 대만 업체 CEO, 부사장, 직원분들께도 칭찬을 받았다. 한 때 나의 상사였던 영업이사님께서도 그동안 몇 번이나 내가 발표하는 걸 보았지만 오늘은 진짜 전문가 같아서 깜짝 놀랐다고 해주셨다.
계속되는 칭찬 가운데에서도 내가 그 자리에서 어떤 포지션을 취해야 할지 매 순간 곤란했다. 사회자란 이유로 하필 VIP석인 대만업체분들과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 그리고 영업이사님은 자기 혼자 5명 커버하기 힘드니 나보고 새 법인 대표님과 본부장님 있는 자리에서 대만업체 사이에 껴서 앉아서 영어로 커버 좀 해달라고 하셨다. 그때 순간 현타 씨게 왔다. "제가 왜요?"라고 정말 순진한 얼굴로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기분 나빠하시면서 됐다고 그냥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고 가라고 하셨다.
내 앞에 자리하신 새로운 법인대표님은 나에게 "(본사) 대표님이 많이 아쉬워하시던데..."라면서 "돈을 많이 벌고 싶어 하신다면서요?"라고 덧붙이셨다. 난 순간, 이게 뭐지? 싶었다. 돈을 많이 벌고자 했으면 내가 오늘 이 자리에 왔었을까? 어쩜 이렇게 하나만 보시고 생각이 짧으실까 싶었다. "그분들이 저를 너무 모르셔서 그러신 거예요. 저한테는 돈보다 더 중요한 게 있거든요. 저는 너무 진심을 다해요. 그게 문제예요."라고 말씀드렸다.
아침부터 억눌렀던 화가 마구 치솟았다. 그리고 왼쪽에 계신 새로운 법인의 본부장님은 "앞으로는 통역 부를 필요 없이 김매니저님이 통역해 주시면 되겠네요."라고 하신다. 나는 또다시, '제가 왜요?'라고 속으로 외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도대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 건지 어이가 없었다.
집에 가기 위해, 잠깐 자리 비우신 경영지원 이사님께 전화를 드렸다. "이사님, 저 이제 가려구요. 정산은 어떻게 될까요?" 여쭤보니, "70-80만 원은 너무 한가?"라고 하신다. 자기네들이 그렇게 돈 밝히는 직원으로 낙인찍은 사람에게, 50만 원보다는 더 얹어주겠다며 호텔비용도 쳐주겠다, 메이크업 비용도 쳐주겠다 하셨으면서 70-80만 원은 너무하냐고? "그냥 100만 원 맞춰주시죠."라고 했더니, 바로 "아 그래요."라고 하신다.
이미 100만 원은 최소선으로 맞춰놓았으면서 굳이 70-80만 원으로 사람을 떠보는 건 무슨 짓이지? 란 생각에 또다시 기분이 더러워졌다. 내가 정말 왜 이렇게까지 했는지 현타가 왔다. 집 가는 택시를 타자마자 너무 허탈했다. 울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엄청 참으면서도 혼자서는 감당이 잘 되지 않은 서러움이 계속 몰아쳤다.
내 마음을 읽어줄 것 같은 언니에게 전화를 해서 하소연해볼까 싶다가도, 한 마디라도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감정이 감당되지 않을까 봐 또 참았다. 그러면서 내가 오늘 왜 이렇게까지 화가 나고 서운하고 억울하고 화가 났는지 이유를 돌아봤다. 그랬더니 그때부터 눈물이 주르르륵 -
'내가 또 진심을 다했구나. 나는 그냥 호구구나.'
'그는 그저 진심을 다해 맡겨진 일을 자신의 일처럼 깔끔하게 잘해줄 호구가 필요했구나.'
'나는 그냥 호구구나.'
'나만 진심이었구나. 진심의 농도가 이렇게나 달랐구나.'
내가 그동안 대표님께 느꼈던 존경과 애정의 농도와 그가 나에게 품었던 기대감의 농도가 달랐다.
값싼 노동력.
나는 그 자체였다.
호구를 자처하는 습관.
매번 말로는 돈 많이 달라고 말씀드려도, 정작 요구해야 할 때는 굽히는 호구.
배우분들께 이야기하니, 열불내시며 100만 원은 너무 적은 금액이라고 말씀하셨다.
원래는 여기에서 메이크업 비용도 따로 받고, 통역비도 따로 받았어야 했다고 하신다.
그 회사에서도 원래 통역을 따로 구할까 했던 것도 안다.
그리고 내가 50만 원을 부른 뒤, 그 사람들이 아나운서 비용이 200만 원 정도라 고민했던 것도 알게 되었었다. 그래서 나를 부른 것도 알게 되었다.
나는 여전히 내가 전문 사회자가 아니니 200만 원은 당연히 받을 수 없는 금액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배우분들은, 그 사람들도 전문가 아닐 거라고 하시면서 전문가든 아니든 패이는 동일하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잘못한 것이라면, 크몽에서 최소비용이 아니라 실제 내가 했던 것들을 상세하게 적어서 견적을 받아봤어야 했는데, 당시에는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어서 하지 않았던 것. 그래서 내 주장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맡겨진 일에 대한 책임만 무작위 하게 쏟은 것.
이제 다시는 대표님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사실 이 날 점심 먹으면서 그동안 나에 대한 오해가 있으신 것 같아, '진짜 나'를 소개해드리고 싶었었다. 내가 돈보다 더 가치 있게 생각하는 것. 그래도 여전히 함께 일하고 싶다고 하시면 함께 일할 생각도 있었다. 그런데 이 날 모든 게 무너졌다. 이제 진짜 아니라는 결론과 함께.
이 날 내가 겪었던 수치심과 억울함은 회사에 있으면서 줄곧 봐왔던 광경이고, 그걸 참지 못해서 스트레스받고 퇴사를 결심했던 것인데 1년이란 시간 동안 회복한다고 하면서 또다시 망각했구나. 회사의 성장과 미래 전망성이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내가 맞출 수 없다면 다시 돌아가는 게 무슨 의미일까를 재차 되새겼어야 했다.
회사가 성장함에도 리더의 자질이 바뀌지 않으면 여전히 같은 시스템으로 굴러간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했다. 그날의 어수선함... 그들은 또 MOU협약식 테이블 양쪽으로 화분 놓을 생각 못하고, 전체 테이블 개수대로 화분 발주해서 정작 가장 빛나야 할 MOU협약식 테이블의 화분 1개를 양 국가의 국기 뒤로 숨겨놓았던 그 모자란 총무가 이 행사 준비 다 했다면서 자기 사람의 공로로 그를 치켜세워주겠지. (그냥 조치 취해주지 말걸 그랬나. 그 센스 없음이 드러날 수 있는 기회였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또 승질나네.) 그러게, 실무능력보다 자신들에게 굽신 굽신하는 사람을 가장 좋은 인재라고 여기며 끌어주는 그 모습도 극혐 했었는데.
이제 정말 내 일만 잘하자. 그곳의 성장과 나는 이제 별개의 사건이다. 그곳은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다. 이제는 아쉬움도 '정'도 남지 않았다. 사람들의 수준이 그 회사의 수준이 아니던가? 적어도 내가 보는 가치관에서는 그렇다. 나는 왜 그렇게까지 그 대표의 비전을 사랑했는가.
일정 하나 취소했다고 이렇게까지 감정적으로 느낄 일이냐고? 가장 사소한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니까요. 만약 이재명 대통령이 당신과 점심 식사를 잡았다고 해도 당신과 같이 했을까요? 이 무례함이 얼마나 품위 없는지, 그 품격의 수준을 보시면 좋겠습니다.
"대표가 그럴 수도 있지!"
"네, 대표니까 그럴 수 있죠. 그래서 전 여기선 함께 일 못 하겠어요."
이제는 미련 없이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