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래서 INFP는 돈을 못 버나요

by 자기 고용자

봄이 오긴 오려나보다. 12월이 가장 캄캄했던 겨울이어서 그런가? 입춘이 지나서 그런가? 봄기운이 슬금슬금 드러나는 느낌이다. 지난달에 온라인 사업한다고 지인들에게 커밍아웃하고 그래도 매주 주문이 들어왔었다. 명절을 맞이하며 모두 다 멈춘 듯하지만 매주 1-2건의 주문이라도 있어서 어찌나 다행이었던지. 고작 그걸로 마음에 위안과 안일함이 머물기도 했다. 명절이 지나면 또다시 발등에 불 떨어진 듯 오동방정을 떨 것 같다.


광고세팅을 했는데 전략을 제대로 짜지 않아서 그런 건지, 광고 단가가 작아서 그런 건지, 노출도 잘 되지 않고 클릭률도 저조하다. 하나씩 다듬어 봐야지. 그리고 지난주에는 초기창업패키지 사업계획서도 제출했다. 아이디어 단계에서는 이 정도면 승산이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머릿속에 있던 것들을 막상 글과 데이터로 표현하려니 매끄럽지 않았다. 그래도 사업계획서는 몇 번 만들어봤어서 초반엔 재밌었는데 너무 늦게 시작한 탓이었나 빈틈들을 꼼꼼하게 메꾸지 못한 게 조금은 아쉽다.


작년에 이직한다고 각 회사에 맞게 전략제안서를 밤새면서 작성했던 게 생각났다. 누구도 시키지 않았고, 데드라인도 따로 없는데 그렇게 밤새면서까지 할 일인가 싶었었다. 이번에는 제출일 전날부터 제출하는 날 밤을 꼴딱 새 버렸다. 근래에는 다시 12시 전후로 잠들려고 했었기 때문에 밤샘 작업이 가능할까 걱정이었는데 웬걸? 몇 천만 원이 걸린 문제니까 눈이 아주 말똥말똥했다. 새벽 4시부터는 약간 어지러워서 머리가 휘청거릴 때도 있긴 했지만! 새벽 6시에 끝마치고 제출했다. 오후에 일정 있어서 10시쯤엔 다시 일어나야지 했는데, 8시간즘? 눈이 떠졌다. 자고 있는 중에도 계속 머리를 굴리느라 잠이 안 왔나 보다.


일어나서도 사업계획서의 예산을 너무 작게 책정한 것 같아서 결국 예산을 다시 책정하고, 몇 군데 더 수정하면서 업로드를 반복했다. 정오즘에는 '이제는 하늘에 맡기자.'라고 결론 냈다. 시장의 문제를 지적하고 제품과 서비스를 결합한 모델을 제안하면서 나름 정의의 사도가 된 것 같기도 하고, 내가 그토록 좋아하고 되고 싶었던 '히어로'가 된 느낌이었는데. 이 작은 1인 사업자가 시장의 판도를 바꾸기 위한 작은 날갯짓이라도 할 수 있기를 바라는데. 모르겠다.


사업계획서 작성하면서도 '이곳에서도 나는 진실을 말하고 싶어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렇게 진실하지도 않은 사람이 왜 그렇게 굳이 굳이 오점을 찾아내어 바로 고치려드냐는 것이다. 실력보다 입발린 말로 승진하는 세상인 회사를 이런 이유로 떠나고, 이제는 '아, 그래 이것이 인생이구나.'라면서 어느 정도의 정치와 더러움을 세상의 이치로 받아들이려 했는데! 굳이 굳이, 이게 문제니까 내가 고치겠다는 말을 회사를 나와서도 하려는 내게 '진정성'이 얼마나 큰 가치인지를 한번 더 깨닫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택갈이만 하면서 판매하는 현재 제품에서는 스스로 확신과 자신이 없어 제대로 영업하지 못하는 '나'. 얼마나 정직하려고. 이 제품도 나쁘지 않은 제품이고, 똑같은 제품, 혹은 더 좋지 않은 제품으로도 뻥튀기 광고하는 브랜드들이 넘쳐나는데도 그들과 같은 길을 가지 못하는 나. 이래서 INFP는 돈 못 번다고 하는 것인가. 서글프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사업계획서에 담은 제품 콘셉트는 제품 기획부터 직접 한 것이라 꼭 선정이 되어서 세상에 말하고 싶다. 이게 만능치료제는 되지 않겠지만은 최소한 소비자들의 실제 문제를 해결하고자 만든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싶다. 경쟁사에서 숨기고 있는 함량도 아주 대문짝만 하게 상세페이지든 패키지든 여기저기에 써주면서 말이다.


제발... 선정해 주세요....


사업계획서를 썼을 뿐인데, 마치 이미 선정된 사람처럼 안정감이 생길 건 무엇이냐. 막연히 되겠지 하면서 생긴 여유. 쓰는 동안 힘들었다며 바라는 쉼을 구하는 보상심리. 지난 금요일부터 며칠을 놀고만 있는 것이냐. 정신 안 차릴래? 에휴.


내가 이런 여유를 부리는 또 다른 이유는 1가지 더 있다. 바로, 지난주에 전직장 대표님으로부터 또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번엔 대표님이 다른 제안을 하셨다. 작년에는 나에게 새로운 법인데 들어오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이번에는 그 새로운 법인의 오픈식에서 사회를 봐달라는 것이다. 내가 회사에 있을 당시에도 대만 협력사를 한국에 유치시키려고 엄청 공을 들이셨었는데, 이번에도 그 협력사에 보여주기식으로 새로운 법인의 오픈식을 하는 것 같다. 정부 관계자와 고객인 대기업 관계자분들도 참석하신단다.


퇴사한 지 만 1년이 되어가는데, 우리 대표님은 마치 자신의 직원 부리듯이 나에게 연락하셔서 '이번 일을 잘할 사람이 누굴까 생각하다가 연락했다.'고 하신다. 대표님 전화 끊자마자 바로 이번 행사 책임자이신 경영지원 이사님께 전화가 왔다. 이사님은 "이제 대표님, 놀랍지도 않아요."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자꾸 다시 돌아오면 안 되냐고 말씀하신다. '그러니까... 있을 때나 잘해주시지 그러셨어요?'라고 속으로만 말했다. 행사날에만 가면 되려나 했는데, 이번 주에는 미팅하러, 다음 주에는 리허설하러 가야 한다. 생각보다 준비할 것도 많다.


나는 분명히 대표님께 돈 많이 주셔야 한다고 말씀드렸는데... 이사님 통해서 받는 거면 그렇게 될 것 같지도 않다. 그냥 봉사활동 하고 오겠네. 그래도 일거리가 있다는 게 나에게 또 안도감을 준다. 미치겠다. 내 마음은 어째서 이토록 가벼운 것인가. 대표님은 나보고 오래 버틴다고 신기하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렇게 버티면 된다고 하셨다. 인정받는 느낌, 난 그걸로 사는 사람인가 보다. 성취해야만 존재감을 느끼는 사람. 그전에 나의 자유가 가장 중요하고!


애니어그램과 MBTI를 보면서, 구조가 필요한 사람인데 그 구조가 내가 만든 것이어야 한다고 한다. ㅋㅋㅋㅋㅋㅋ 정말 웃겼다. 그 한 문장에 '나'란 사람이 너무 이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일을 하면서 늘상 나는 구조를 만들어놓는 걸 편해하는 것 같았는데, 이상하게 회사에서 만들어 놓은 건 답답해했었다. 회사에서 만들어놓은 규칙을 지키는 게 나란 사람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학창 시절을 떠올려 봤을 때도 나는 학원 다니는 걸 좀 한심하게 여겼다. 기계적으로 인풋하는게 좀 멍청해 보였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중3 때 난생처음 공부란 걸 해봤는데, 친구랑 도서관을 다녔다. 내 속도에 맞춰서 내 멋대로 공부하는 게 재미있었다. 물론, 고등학교 지원할 때 보는 시험(이름도 까먹었네)을 보기 위해 3개월 학원 다녔던 적은 있다. 기초가 없었으니까.


지금 돌이켜보면 내가 만약 초등학생 때부터 학원을 다녔다면 고등학교 때 좀 더 잘 적응했을 것 같긴 하다. 얼마 전에 베프랑 이야기하면서 그 친구가 중학생 때 화성(시골)에서 수원으로 학원 다니며 고등학교 과정을 선행학습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괜히 혼자 배신감이 들었었다. 고등학교 입학 전 방학 때부터 학교 기숙사 들어가서 교수님께 수학을 배우는데 첫 장부터 개념이 이해가 안 되었었다. 당시에는 최상위 2개반만 교수님께 수학을 배웠었는데 교수님의 언어가 너무 어려웠다. 나만 빼고 다른 친구들은 모두 이해하는 느낌이었고 교수님이 너무 차도녀 느낌이라 질문하지도 못했다. 그러면서 성적이 아주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고 자신감을 잃었다.


단순히 기숙사 시스템이 자유로운 나의 성향과 안 맞아서 입시에 실패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만약 출발이 좋았다면 날개 달린 듯이 신나서 공부했을 가능성도 20% 이상은 생길 것 같다. 결과는 비슷할 수 있겠지만?! (무슨 의식의 흐름이 이런 식으로 가고 있는 거지? ㅎㅎ) 회사 이야기하다가 성격기질검사 이야기하다가 고등학교 때 이야기까지 왔는데, 오랜만에 글 쓰다 보니 생각에 빠지고 있었나 보다.


얼마 전에 교회에서 모임 할 때에도 고등학교 때 기숙사 생활했던 이야기가 나왔었는데, 그때 한 오빠가 나보고 글 잘으니까 지금이라도 한비야처럼 여행 다니면서 글이나 쓰라고 했었다. 나 또한 무진장 원하는 삶이다. 내가 가장 후회하는 게 대학교 간 것이었다고, 차라리 그때 대학교 대신 여행 다녔어야 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 늦지 않았냐고 말했는데, 마침 그 모임에서 내가 막내였다. 8C(에이씨).... 언니들은 나보고 맨날 어리단다. 다들 배우분들이셔서 청춘이시다. 난 이곳에서 그 어느 때보다, 어디에서보다 자유로워지지만 가끔은 이렇게 현실을 망각해도 되는 건가 싶기도 하다. 또는, 나는 이 세상에서 사는 게 맞는데 아직도 저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건가 싶기도 하고.


집안에서 받은 세뇌교육이 이렇게 무섭다. 요즘은 이걸 '가스라이팅'이라고 하지? 어렸을 때부터 대기업 아니면 공무원 되어야 한다는 아빠의 가스라이팅을 받고 자랐다. 너무 어이없게도 언니랑 남동생은 극강의 T성향을 가져서 황폐한 가정환경 속에서도 공부를 잘했다. 나는 한번 감정이 상하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침대에 틀어박혀서 울기만 했다. 오죽하면 언니가 "쟤는 한번 울면 4시간이야."라고 엄마한테 비아냥거렸다. 실로 고등학생 때까지 나는 주워온 자식인 줄 알았다. 혼자만 너무 다르니까.


초등학생 때는 혼자 여자들이 옷 입은 걸 그리면서 패션디자이너가 되고 싶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 봐도 초딩치고는 꽤 괜찮은 그림을 그렸었다. 그 옆에서 언니는 "원래 여자애들은 죄다 패션디자이너, 남자애들은 죄다 축구선수 되고 싶다고 하지 않아?"라고 또 찬물을 끼얹었다. 내가 만약 미대에 갔었다면, 어땠을까? 그게 평생의 한이 되어서 이제라도 그림을 그리지만. 그때는 그 한마디가 어린아이 전체를 삼켜버렸었다.


여전히 '차라리 몸을 움직이는 일을 했었다면 밥을 먹지 않아도 하루 12시간씩은 움직일 수 있었을 텐데.'라면서 책상 위에 있는 나에게 들릴 듯 말 듯 속삭인다. 지금은 살짝은 나에게 맞지 옷을 입은 것 같아 불편하긴 하다. 다만, 회사보다는 좀 더 나아서 숨통이 좀 더 트일 뿐이다. 요즘 들어 자꾸만 춤을 추고 싶은 마음이 다시 올라온다. 몸을 움직이며 에너지를 분산시키고 한 동작 움직일 때마다 나를 표현하고 싶은 충동 말이다. 그래서 대신 올해는 다시 달려야겠다 싶다. 마라톤 대회도 다시 나가면서 꾸준히 달려야지. 건강도 챙기면서 멘탈도 잡아야지.


이제 급하게 처리할 일들이 어느 정도 세팅이 되면서 삶의 발란스를 찾아가고자 한다. 그래서 운동 시간도 좀 더 늘리고, 영어공부도 하고, 책도 읽고, 단단해져야지. 올 한 해는 다시 쌓아가야지. 그리고 올 한 해는 더 단단해지고, 더 밀도를 채우면서 정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배우자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뭐 그런 게 있나 싶고, 약간 유치한 것 같기도 하고, 오글거리기도 해서 듣기 싫었다. 내 멋대로 이 사람 저 사람 다 만나고 나니까, 인연은 정말 있는 것 같고, 어디에서 만날지 모르니 내가 지금 준비되어야겠다 싶다. 그래서 올 한 해는 좀 더 기다리는 마음으로 나를 채우면서 기도해야겠다. 정말.


설 명절맞이 글이 길었다. 누군가는 새해 인사를 도대체 언제까지 계속해야 하는 것이냐고, 벌써 2월인데 아직도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말을 하냐고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새롭게 시작할 명분을 가질 수 있다는 건 좋은 것 같다. 그래서 나도 그럴려구. 이번 설이 지나면 다시 살아보려구. 다시, 해보려구. 다시, 다시, 다시 나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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