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잘 살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by 자기 고용자

오늘은 일 년에 몇 번 없을 보람을 느낀 날이다. 이번에 입사할 회사에서 최종 관문으로 오늘 레퍼런스 체크를 진행했다. 전 직장 직속상사 두 분께 전화드려 '나'란 사람에 대한 피드백을 듣는 일.


참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말단 직원이었는데, 직속상사분들은 대표님과 부사장님이셨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좋게 나에 대해 말씀해 주셨다. 원래 10분 정도 예정되었던 통화가 첫 번째 콜인 부사장님과는 25분으로 길어졌고, 대표님도 평상시 통화하실 때 앞뒤 다 자르고 하시는 경향이 있으신데 오늘은 10분 이상으로 길어졌다.


원래는 오늘 오전 11시 예정이었어서 아침에도 미리 대표님과 부사장님께 리마인더를 드렸었다. 그런데 오후 2시 50분경, 부사장님께 아직 전화가 안 왔다는 연락을 받았다. 확인해 보니 이직할 회사에서 오전 중 통신 이슈가 있어서 못 드렸다고.. 그래서 일단 부사장님 통화 먼저 4시 30분 정도에 진행하고, 40분 정도에 대표님과 진행하기로 했다.


인사담당자와 부사장님의 통화가 길어지는 가운데, 45분경에 대표님께도 아직 연락이 안 온다는 카톡을 받았다. 중간에서 굉장히 난처했다. 아침에도 바람 맞히는 격이 되어 연실 죄송하다고 말씀드렸는데, 또 늦어져서... 아예 다른 시간대로 나누어했어야 했나 보다.


아무쪼록 나도 부사장님과 통화를 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셨길래 이렇게 통화가 길어졌는지 너무 궁금했다. 나의 단점이라면... 뭔가 자꾸 새로운 걸 배우려 하고 욕심이 많아서로 잦은 이직 사유를 예쁘게 포장해 주셨다. 그리고 매주 주말에 일해야 해서 항상 노트북 들고 다닌 것도 불평하지 않고 책임감 있게 해 주었고, 주말 일할 땐 사람들에게 자료를 전달받아야 진행되어 급하게 재촉하다 보면 사이가 나빠질 법도 한데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해주셨다. (퇴사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당시에 매주 주말에 일했던 사실을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었다.)


그리고 대표님께는 더 감동받았다. 사실 지난주에 소심한 복수를 하듯이 레퍼런스 체크를 부탁드렸기 때문에 그다지 기대하지 않은 상태였다. 공대출신이셔서 풀어서 설명하는 걸 어려워하신다고 생각했다. 대표님은 나에 대해 너무 극찬을 많이 해주셨다. 물론 업무가 이전과 달리 내가 가진 역량들을 펼칠 일들이 더 있었기 때문도 있었다. 발표 같은 거 잘한다, 외국 가서도 영어로 발표했다, 영어도 잘한다, 지금 당장 임원이 되어도 손색이 없다, 어느 정도 기간이 지났는데 임원이 못 되면 거기에 임원자리가 없어서다 등 말씀해 주셨다.


단점은 뭐라고 하셨냐니깐, 소통이 잘 되었을 때 더 창의적으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고 돌려 말씀해 주셨다. 솔직히 이 말씀을 듣고 깜짝 놀랐다. 대표님께서 우리의 지난날의 문제를 꽤 정확히 알고 계신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부분을 알고 계셨냐고 대표님께 여쭤봤더니, 지나고 보니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는 것 같다고 하신다. 그리고 그곳에서 전문성을 잘 펼칠 수 있게 잘 가르쳐주고 도와주시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이건 나의 취약점이다. 이것저것 건드린 게 하도 많아서 '뭐든 잘하지만 무엇 하나 잘하는 게 없는 것.'


대표님께서 잘 배우고 오라고 하시는데, 부모가 자식 떠나보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면서 대표님 회사는 내년에 매출 10배 성장하고 2년 내에 상장 예정이라고 자랑하셨다. 순간 멈칫했지만, 이제 그곳은 나의 자리가 아니라고 여기기로 했으니깐이라며 마음을 추스렸다. 미래는 알 수 없지만 지금 당장은 그렇다.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이직하면서 산업군이 같아 앞으로 대표님과의 연결고리가 결코 끊기지 않을 것 같기도 하다.




사실 오늘 레퍼런스 체크 전에는 여러 가지 일들이 겹치면서 기운이 좀 없었다. 그중 가장 큰 원인은 사업 아이템 중 하나가 사회적으로 이슈가 생기면서 일주일에 2개 정도 주문이 들어왔던 것 마저 아예 딱 끊겼고 재고는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막막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내일 지난주에 배웠던 쇼핑라이브를 실제로 해보려고 했는데, 이 제품은 아예 빼기로 했다. 새로 발주한 지 얼마 안 되어 아직 택배 박스도 뜯어보지 못한 상태인데 1박스는 재고가 그대로 남았고, 그전에 발주했던 1박스도 반 정도밖에 팔리지 않은 상태이고.


그래서 4월에 입사하는 게 어찌나 감사하던지. 정말 거의 길가에 나앉을 뻔했다. 그리고 이번에 이슈 터지는 걸 보니, 아무래도 사업 방향을 바꾸는 게 맞단 생각이 더 들었다. 조금 더 예술적인 걸로. 내가 하고 싶다고 했던 걸로. 그림 그려서 뭘 하든, 아니면 뭔가 미적인 요소가 가미된 아이템으로 바꿔야겠다. 난 가뜩이나 식품 쪽에 관심이 없는 편인데, 현재 사업 아이템 정할 때 계속 우려했던 게 결국 터지는 걸 보니 이곳은 피해 가라는 뜻처럼 보인다.


회사에서는 배울 게 너무 많고 스트레스 강도가 높아서 아마 투잡 하기는 쉽지 않을 거라고 했다. 그래도 나는 또 욕심을 낸다. 어떻게든 둘 다 가져가야지 싶다. 언제 또 어떤 식으로 퇴사할지 모르니깐. 여기에는 '해고'도 포함이다. AI가 대부분의 일자리를 앗아가는 시대, 내일 당장 잘리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으니까.




사업 막 시작할 때, 언니들이 와서 제품 포장하는 것 도와줄 때도 너무 감사하다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때의 감사와 오늘의 감사는 결이 약간 다르다. 그때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느꼈다면 오늘은 내가 심어놓은 씨앗에서 아주 작은 새싹이 피어난 느낌이다. 부사장님과 대표님께서 이렇게까지 극찬을 해주실 줄은 몰랐다. 그리고 가장 좋았던 점은 사실 내가 잘했다라기 보다 이 분들의 '진짜 어른'되심을 볼 수 있었던 점이다. 대표님도 감정적인 부분보다 헤어질 땐 축복해 줘야지 하는 마음이 강하셨던 것 같고, 부사장님께서는 내가 전 직장에서 힘들어하던 부분까지도 세심하게 기억해 주셔서 그것도 좋게 말씀해 주셨던 게 내 생각보다 크신 분이구나를 느꼈다.


멋진 어른들을 뵐 때마다, 나도 정말 그렇게 살고 싶어진다. 멋진 어른으로. 나도 작년보단 조금 더 어른이 되었겠지?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대표님께 상처받았다고 징징거렸었는데 참 웃기다. 그래서 대표님께서 레퍼런스 체크 끝나고 전화 주셔서 내가 받자마자 "어? 전화받네? 안 받을 줄 알았는데? 난 또 안 받으면 어쩌나 했는데."라며 놀리셨다. 그때는 "어휴, 대표님 전화를 당연히 받아야죠. 제가 왜 안 받아요. 당연히 받아야죠."라고 받아쳤지만 끊고 나서야 내가 이제 연락 안 받을 거라고 했던 거 때문에 놀리신 거구나 깨달았다.


민망했다. 부끄럽고. 그래서 대표님이 좀 더 어른처럼 보였다. 유치한 세상. ㅋㅋㅋㅋ 세상 살이, 왜 이렇게 다 유치한 것일까. 사람들이 모인 곳은 왜 이렇게 유치한 것 투성일까. 내가 잘났니, 네가 잘났니, 네가 잘못했니, 상처받았니 하면서 살아가는 세상.


결론. 난 아직 애인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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