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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ni Jul 22. 2019

여성 혐오 여성관의 시대적 변화 [2. 데리다]

3부. 20세기 시대정신과 데리다의 해체주의


1부에서는 니체가 살았던 19세기의 시대정신과 니체의 비시대 정신을,

2부에서는 니체의 저서들을 통해 글 속에 녹아있는 그의 여성관을 살펴보았다.

3부에서는 새로운 시대, 데리다를 통한 니체의 재평가와 당대의 여성관에 대해 알아보자.

    

Jacques Derrida (1930 ~ 2004)


20세기 시대정신: 남근-로고스 중심주의


  데리다가 바라본 2000년대 서양 형이상학의 역사는 음성언어 중심주의, 즉 로고스 중심주의였다. 음성언어를 1차적으로 삼으며, 이와 대비되는 문자언어는 보충과 대리로서 2차 언어로 사용되었다. 예컨대,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이나 <신약성서> 요한복음 1장 1절의 "태초에 말씀(로고스)이 계셨다"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당대의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 역시 대부분의 전통적인 서양 형이상학과 마찬가지로 자연스레 문자언어보다 음성언어를 더 우월하다고 보았다.

  서구 형이상학의 전통에서 문자는 죽음과 부재의 이미지를 갖는 반면, 말은 생명과 현재로 간주된다. 서양 언어의 근원이 되는 그리스어에서 '로고스'는 말을 의미하며 동시에 '이성(理性)의 어원이다. 즉, 로고스 중심주의는 이성중심주의(동일자, 우리)를 뜻하며 비이성적인 것(타자)을 배제하고 억압하는 이론적 근거가 된다.

  박정자 교수(상명대)에 의하면, 로고스 중심주의는 일자 중심이자 태양 중심이기도 하다. 태양 중심 사상은 세계가 중심과 주변으로 나뉘며 이때 변방과 밤은 중심과 빛에 상반되는 개념이 된다. 동일자를 중시하는 로고스 중심주의는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므로 타자를 폭력적으로 다스리거나 전체주의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다. 이것이 바로 데리다가 말하는 폭력의 철학이며, 기존의 남근-로고스 중심주의의 형이상학적 체계의 해체를 요구하는 그의 해체 사상이 권위의 부정으로 연결되는 원인이 되었다.


(좌) 소크라테스(Σωκράτης, Socrates), (우) 데리다(Jacques Derrida) 만화


20세기 시대정신: 포스트모더니즘, 해체의 시대


  건축, 미술, 패션, 광고, 철학, 문학 등 분야를 막론하고 해체주의가 도래하였다. 이렇듯 해체가 다양한 문화현상의 저변에 조용히 그러나 넓고 깊숙이 스며들 수 있었던 까닭은 해체주의가 가진 해방감 때문이다. 자로 잰 듯 대칭적인 건물들과 여성의 육체를 코르셋으로 압박하는 옷 등 르네상스 시대의 유물들에서 해방되어 사람들은 다른 것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된 것이다(예컨대, 직선과 직각 대신 구부러지고 휘어진 사선, 우아하고 아름다운 것 대신 더럽고 지저분한 것, 칼날 같은 구분 대신 애매모호한 비정확성, 위선적인 엄숙함 대신 어린아이의 천진함 같은 유희를 추구하게 되었다). 그동안 옥죄었던 이성의 틀을 비로소 벗어던지고 무질서에서 비롯된 편안함을 느끼게 된 우리는 더 이상 중심이 필요하다고 생각지 않거나, 중심이 존재하더라도 유일무이한 것은 아니며, 주변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중심으로 상징되던 권위가 해체됨으로써 모두가 등가의 가치를 가지게 된 사회가 도래한 것이다.


(좌) 프랭크 게리(Frank Gehry)가 설계한 집, (중) Frank Gehry의 MIT 스타타 센터, (우) 스페인 빌바오(Bilbao) 구겐하임 미술관


구스타브 메츠거(Gustav Metzger)의 행위예술.


(좌) Comme de Garcons 디자이너 레이 가와쿠보의 '소년처럼', (중, 우) Benetton 광고 '피묻은 옷'과 'Condom Olympics'


  박정자 교수는 이러한 해체의 시대와 해체의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뭐든지 단정하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자르고 깎고 맞추고 중심을 잡고 균형을 잡아 반듯하게 쌓아 올리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알았던 우리의 의식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다. 프랭크 게리의 건축이나 레이 가와쿠보의 패션에서 우리는 분리되고, 분해되고, 풀리고, 해체되고, 조각나고, 빠지고, 단절되고, 고장 난 것들이 우리의 시각을 강렬하게 사로잡고 있음을 느낀다. 해체가 우리의 지배적인 시각 환경이 되었다는 것은 우리의 의식 또한 해체로 경도되고 있음을 뜻한다. 탈 권위, 탈 중심이라는 현대적 의식의 도도한 흐름은 해체적 가시성의 풍경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지금은, 서양 언어로는 de, dis, ex 등의 접두어가, 한국어로는 탈(脫), 비(非), 반(反) 등의 접두어가 지배하는 해체의 시대이다.
  그리고 해체라는 도도한 흐름의 근원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가 있다. 건축이나 패션에서 볼 수 있는, 뭔가를 풀고 허물고 부순다는 시각적인 해체의 개념과는 달리 데리다의 해체는 그렇게 쉬운 개념이 아니다. 플라톤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서구 형이상학의 전통과, 소쉬르에서 시작되는 구조주의 언어학의 기초지식을 가지고 있어야만 이해가 가능한 난해하기 그지없는 이론이다. 하이데거에 의해 처음으로 쓰였지만 데리다가 그것을 체계적으로 사용하고 정교하게 이론화하였다. 비판자들은 이 단어의 뜻이 애매모호하고 지나치게 겉멋만 부렸다고 비난했다. 사실 그의 글쓰기 스타일은 신조어와 왜곡된 철자법, 괄호와 생략 부호들의 이상한 사용 등으로 모호하기 짝이 없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데리다의 ‘해체’는 소크라테스 이래 지금까지 내려오는 서유럽의 전통적 형이상학을 비판하면서 그 철학 체계를 처음부터 다시 쌓아 올릴 것을 주장하는 방법적 실천의 이름이다. 그에 의하면 서구의 형이상학은 전통적으로 문자 언어를 폄하하고 음성언어에 특권을 부여함으로써 폭력적인 이성중심주의(로고스 중심주의)로 흘렀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해체’란 서구 철학의 전통적인 형이상학을 부정하고 그 개념에서 벗어나려는 철학적 시도이지 철학 자체를 완전히 파괴하여 말살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구체적으로는 하나의 텍스트가 가진 의미의 모호함을 드러내기 위해, 거기에 숨겨진 가설과 생략들을 찾아내 초점을 맞추는 읽기 방식이다. 칸트나 루소 같은 대가들의 저서를 해석할 때도 주요 논지보다는 서문이나 주(註) 같은 주변적 요소들에 조명을 비춰 저자의 개념적 등급을 전복하기 일쑤다. 언어의 비확정성과 불안정성을 보여주기 위해, 그리고 말들 속에 숨겨진 잠재적 의미를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그는 말한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해서 해체는 철학적 체계나 방법이 아니고 하나의 실천이다. 그러나 여러 분야에 광범위하게 스며든 ‘해체’의 개념은 이제 현대 철학의 한 방법이고 사조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 De la grammatologie》(1967)


텍스트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 『그라마톨로지』중에서


데리다의 해체주의 

  

  데리다는 소쇠르적인 구조주의를 넘어서서 음성언어 이전에 문자언어가 존재한다고 보았으며, 원시의 문자(원문자)와 문자의 보편성을 토대로 문자언어의 1 차성을 확인한다. 즉, 데리다는 문자언어의 선차성을 찾음으로써 로고스 중심주의를 해체하고자 하였다.

  데리다는 텍스트를 전통적인 방식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데리다가 말하는 해체는 단순히 대상의 철거나 분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의 내적 구조 속 모순을 드러내고 그러한 모순이 지닌 텍스트의 무의식을 파헤치는 활동을 뜻한다. 그렇다고 해서 데리다가 언어와 독립된 실재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다만, 우리가 언어를 사용할 때 그 언어가 상정하고 있는 대상 또는 실재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의심했다.


데리다의 차연(Difference)와 해체주의


  데리다의 해체주의 개념은 사실 하이데거가 먼저 제시했다. 둘의 차이는 해체하는 대상에 있다.

  하이데거는 세계 안의 나를 확인하고 그 본질과 의미를 찾는 해체를 말하였다면, 데리다는 존재하는 모든 권위에 대한 허물기로서의 해체를 의미한다. 즉, 해체를 통해 세계 안의 나를 바라본 하이데거와 달리 데리다는 내가 존재하는 세계 자체를 해체하는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데리다는 하이데거와 달리 '언어'와 '텍스트'를 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언어야말로 일상생활에서 가장 많이 활용되는 영역이며 따라서 가장 강하고 중요한 해체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특히 언어로 구성되는 담론은 언어 사용자들의 세상을 이해하기에 가장 용의하다. 그들의 생활양식에서부터 사고방식에 이르기까지 언어는 다방면에 걸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정치철학자 김만권 교수는 '검둥이', '꿀벅지', '초콜릿 복근'과 같은 예를 들어 설명한다. 제시된 단어들은 해당 사회가 가진 시선과 편견을 반영한다. 김 교수는 "누구를 위해 여자의 허벅지는 꿀 같아야 하며 남자의 복근은 초콜릿 같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서 해체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좌)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중)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우) 데리다(Jacques Derrida)


  이러한 사고를 바탕으로 니체의 문체에 등장하는 여성관에 대한 데리다의 분석은 아래와 같다. (인용: 니체의 여성관 관련 세미나 자료)


니체의 문학들에 대한 분석


  니체에 따르면 여성은 3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지는데, 남성이 생각하는 여성, 남성 같은 여성, 여성 고유의 특이성에 근거한 여성이다. 데리다는 이를 거세된 여성, 거세하는 여성, 긍정적 여성으로 표현했다.  
니체, 그에게는 세 부류의 여성이 있었다. 니체는 아마도 거세된 여성이었고, 그런 여성을 두려워했을 것이다. 그는 거세하는 여성이었고, 그런 여성을 두려워했을 것이다. 그는 긍정적 여성이었고, 그런 여성을 사랑했을 것이다. 그는 안팎의 여성들을 사랑했다.

- 『에쁘롱』중에서

 

① 남성이 생각하는 여성은 거세된 여성이자 남성이 만들어낸 여성 이미지다.

  남성이 생각하는 여성이란, 남성들이 만들어낸 여성의 이미지이며 곧 남성의 여성이다. 이는 여성 일반의 이미지로, ‘여자는 연약한 존재, 여성은 직장의 꽃’에서 보이는 여성 이미지다. ‘여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미지는 남성이 만들어낸 이미지이고, 여성은 그것을 연기하면서 내면화한다. 즉 여성은 남성이 만들어낸 이미지이다. 여성은 그 이미지를 남자들이 상상하는 대로 연기해준다. 그러한 여성 이미지를 연기하다 이미지에 갇힌 여성이다.
  거세된 여성은 결핍으로서 정의된 여성이다. 남근 중심의 사회에서 남근성이 결핍된 여성이며, 남성의 상대적 의미로서만 정의되는 여성이다. 거세된 여성은 복종하는 여성으로, 자유정신이 결여된 여성이다.       
남성은 여성을 소유물로서, 사유재산으로, 봉사함으로써 자신을 완성하는 존재로 파악할 수밖에 없다.

- 『선악의 저편』중에서


② 남성 같은 여성은 거세하는 여성이자 여성이 만들어낸 여성 이미지다.

  ‘남성 같은 여성’이란, 남성화된 여성으로 여성적 본능이 약화된 여성, 탈여성화된 여성이다. 이는 남성이 만들어낸 여성의 이미지에 반발하여 이상적인 여성의 이미지를 창안하려는 여성들의 시도이다. 19세기 여성해방운동, 페미니스트들이 보여주는 이미지이다. 그런 의미에서 ‘남성 같은 여성’은 ‘남성이 생각하는 여성’ 이미지의 음각 화이다. 니체는 여성이 만들어낸 이러한 여성 이미지가 남성이 여성에게 가했던 폭력과 다르지 않다고 한다. ‘남성 같은 여성’은 ‘남성이 생각하는 여성’ 이미지에 대한 반사적 이미지로, 남성이 가진 독단적 이미지를 그대로 답습한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롤랑이나 드 스탈, 조르주 상드는 여성적 본능의 타락을 드러내는 것이다. 남성들 사이에서 세 명은 우스꽝스러운 여성일 뿐이다. 이들은 여성해방과 여성 예찬에 대한 의도하지 않은 최상의 반대 증명이 될 뿐이다

-『선악의 저편』중에서


③ 여성 자체는 긍정적 여성이자 여성 고유의 특이성에 근거한 여성 이미지다.

  여성 자체란, 여성 고유의 특이성에 근거한 여성 이미지이다. 여성 고유의 특이성이란, 니체가 추구하는 궁극적 가치인 “모든 사물이 고유성ㆍ특이성에 도달하는 길”이다. 여성의 임신능력은 여성적 특이성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속성이다. 특히 여성의 임신능력은 신체성으로 표현되는 생성능력으로, 이러한 임신능력(신체적 생성능력)이야말로 여성의 신체적 특이성이다.
  니체는 여성의 임신능력(생성능력)에 포착하여, 이를 새로운 가치 생성 능력의 상징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여성의 신체적 특이성으로서 임신능력은 이제, 가치생산 능력으로 일반화되고 가치 생성의 능력이 없는 인간은 불임증으로 비판된다.              
여인에게 있어서 모든 것이 하나의 해결책을 갖고 있으니 임신이 바로 그것이다. 여인에게 사내는 일종의 수단일 뿐이다. 목적은 언제나 어린 아이다.

-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중에서



'4부: 데리다의 저서에 나타난 여성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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