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희 소설
오늘따라 도서관은 유난히 고요했다. 아침부터 거칠게 내리던 비는 오후가 되면서 점점 부드러워졌다. 얼어붙은 땅 위로 스며드는 빗물이, 어쩌면 겨울을 떠나보내고 봄을 맞이하는 자연의 신호일지도 몰랐다. 창문을 타고 흐르는 빗방울을 바라보던 제이는 조용히 숨을 들이마셨다. 겨울과 봄 사이, 이 애매한 계절이 그녀에게는 항상 특별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모든 것이 끝나가는 듯하면서도 새로운 시작이 기다리고 있는 시간. 아직 남아 있는 추위와 싹을 틔우려는 봄의 기운이 뒤섞인 날들. 늦겨울에서 초봄으로 넘어가는 이맘때, 도서관은 더 조용해졌다.
도서관 마당에는 겨우내 앙상했던 나무들이 서 있었다. 벚나무는 아직 꽃을 틔울 준비를 하지 못했지만, 가지 끝에는 작은 봉오리가 움트기 시작했다. 바람이 불면 잔가지가 부딪히며 마른 소리를 냈다. 반면, 늘 푸른 소나무는 변함없이 짙은 초록빛을 유지하며 도서관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비를 머금은 나무들은 촉촉이 젖어 있었고, 빗방울이 잎사귀 끝에서 맺혔다가 조용히 떨어졌다. 땅에는 겨울을 견뎌낸 작은 풀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비가 조금만 더 내리면, 곧 푸른 잎이 돋아날 것 같았다.
제이는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듯, 도서관도 변화를 맞이하는 곳일까? 도서관은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사람들을 맞이하지만, 그 안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시간을 보내고, 다른 이야기들을 품고 간다. 마치 계절이 바뀌듯, 책을 통해 사람들의 삶도 조금씩 달라지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제이는 자신이 정체되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30대 초반, 직장도 있고 정규직도 되었지만,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사는게 좋은 삶인지 여전히 확신이 없었다. 자신은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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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는 반납 기한을 넘긴 책을 정리하다가 익숙한 제목을 발견했다. 『태엽 감는 새』. 이 책은 지난달에 한 여성이 대출한 것이었다. 그녀는 이사를 준비하며, 책과 함께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녀가 돌아가고, 영숙은 다른 반납 도서들을 정리했다. 『모순』, 『달까지 가자』, 『밤의 여행자들』. 각각 다른 사람의 손을 거쳐온 책들. 그때, 한 중년 남성이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반납이 좀 늦었습니다.”
그는 『딸에게 보내는 편지』를 조심스럽게 제이에게 건넸다.
“사실은 이 책을 반납하려고 했는데, 쉽게 손이 안 떨어지더라고요. 제 딸이 멀리 유학을 가 있어서, 이 책을 읽는 동안 계속 딸 생각이 났거든요.”
그는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잠시 후, 한 대학생이 서가에서 책을 들고 다가왔다. 『어떤 직업이 내게 맞을까?』라는 제목이었다.
“사서님, 이 책 연장 가능할까요? 요즘 진로 고민이 많아서요.”
제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책을 연장해 주었다.
“책을 읽다 보면 뭔가 실마리가 잡힐 수도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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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제이는 정리되지 않는 생각들에 잠겨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 일이 나에게 맞는 걸까? 내가 정말 원하는 삶은 무엇일까?
사서라는 직업은 안정적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10년, 20년이 흘러도 만족할 수 있을까? 때때로 그녀는 다른 길을 고민했다. 대학에서 문헌정보학과를 전공하긴 했지만 어렸을 때부터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재주가 있다는 칭찬을 많이 들었다. 그러나 취업이라는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다른 선택을 해야 했다. 지금 위치가 마음에 썩 들지 않다고 해도 그렇다고 뭔가 뚜렷한 목표는 없다. 뭔가 현실적인 벽이 그녀를 붙잡고 있었다.
후배 사서가 그녀에게 『어른이 되면 괜찮을 줄 알았다』를 건네며 말했다.
“선배, 요즘 고민 많아 보이세요. 이 책, 저한테 도움 많이 됐어요.”
책을 받아든 제이는 책장을 넘기며 자신을 돌아보았다. 정말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안정적인 직장을 갖고, 사회에서 역할을 하면 그것이 완성된 삶일까? 아니면 여전히 고민하고 방황하는 것이 당연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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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제이는 창가에 앉아 오랜만에 자신의 일기를 펼쳤다. 그녀는 삼남매 중 첫째였다. 부모님은 언제나 그녀에게 ‘책임감 있는 맏이’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지만, 때때로 그 무게가 버겁게 느껴지곤 했다. 동생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는 압박, 부모님이 힘들 때 조금이라도 부담을 덜어야 한다는 의무감. 그 모든 것이 그녀를 빨리 철들게 했지만, 때로는 아무 걱정 없이 살아가고 싶다는 바람도 들었다.
도서관은 그녀의 일터이면서도, 때로는 그녀에게 질문을 던지는 공간이었다. 책이 사람을 기억하듯, 도서관도 사람들의 기억을 품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 기억들의 일부가 되고 있는 걸까?
창밖에는 어느새 비가 그치고 맑은 달빛이 비치고 있었다. 제이는 책을 덮으며 미소를 지었다. 도서관은 사람들의 이야기와 기억이 쌓이는 곳이다. 그리고 오늘도 또 하나의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