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희 소설
본격적인 봄이 찾아오면서 도서관의 밤도 달라졌다. 예전에는 해가 빨리 저물어 도서관이 이른 저녁부터 한산해졌지만, 이제는 늦은 시간까지 남아 책을 읽거나 공부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창가에 앉아 책을 읽는 대학생, 조용히 신문을 넘기는 노인, 손을 맞잡고 동화책을 읽어주는 부모와 아이까지, 도서관은 다양한 사람들의 일상과 고민을 품고 있었다. 야간 개방 시간이 끝나가던 무렵, 제이는 책상 사이를 돌며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사람들에게 정리 안내를 했다.
“오늘도 늦게까지 공부하시네요. 곧 마감 시간이니까 정리 부탁드릴게요.”
한쪽에서 공부하던 남학생이 고개를 끄덕이며 노트를 덮었다.
“네, 감사합니다. 오늘 중요한 시험 준비 중이라서요. 도서관 덕분에 집중할 수 있었어요.”
그의 책상 위에는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과 『논리적 사고와 토론』이 놓여 있었다. 제이는 그가 시험공부를 위해 필기한 노트 위로 살짝 눈길을 주었다. 페이지마다 형광펜이 촘촘히 그어진 줄이 보였다. 자기계발과 학업을 위해 밤늦게까지 머무는 사람들을 볼 때면, 자신도 학창 시절 시험공부를 위해 도서관에서 밤을 지새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창밖에는 도서관 앞 가로등 불빛이 잔잔히 흔들리고 있었다. 공기가 조금씩 따뜻해졌지만, 밤공기는 여전히 차가웠다. 늦은 밤 도서관을 나서는 사람들은 몸을 움츠리며 코트 깃을 세웠다. 책을 안고 걸어가는 학생들, 서가를 돌아보다 마지막으로 한 권을 더 고르는 직장인. 도서관은 그들의 하루 끝에 남은 마지막 쉼터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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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 제이는 버스 정류장에서 동창인 희진과 우연히 마주쳤다. 희진은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하고 있었다.
“제이야, 오랜만이야! 여전히 도서관에서 일하고 있어?”
“응. 벌써 5년째가 됐네. 너는?”
“출판사에서 바쁘게 지내. 사실 요즘 회사가 힘들어서, 다른 길을 찾아볼까 고민 중이야. 출판계가 워낙 불황이라서.”
제이는 순간 멈칫했다. 출판사에서 일하던 친구마저 새로운 길을 고민하고 있었다. 불안정한 직업이라고 생각했던 출판사도, 안정적인 도서관도 각자의 고민이 있었다.
“나도 사실 가끔 고민해. 지금 하는 일이 평생 해도 괜찮을까, 내가 이 일에서 진짜 행복한 걸까.”
희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우리 나이 때는 다 그런 것 같아. 30대 초반, 인생에서 무언가 확신을 가져야 할 것 같은데, 여전히 모르겠다는 게 문제야.”
제이는 희진과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따뜻한 커피가 두 사람 사이에 놓였다.
“그럼 넌 출판사에 계속 다닐 거야?”
제이가 묻자, 희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잘 모르겠어. 처음에는 책을 만드는 일이 재미있었는데, 요즘은 편집 업무에 치이다 보니 정작 책을 제대로 읽을 시간이 없어. 그만 두고 공무원 시험을 다시 준비할까 싶기도 하고. 근데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싶어.”
제이는 그녀의 말에 공감했다.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 사이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이 고민하고 있을까.
희진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근데 너도 고민이 많아 보여.”
제이는 커피잔을 손에 쥔 채 말했다.
“나도 비슷해. 사서라는 일이 싫은 건 아닌데, 가끔은 다른 길이 궁금하기도 해. 내가 진짜 원하는 일인가 싶기도 하고.”
희진은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런 고민들이 꼭 나쁜 건 아닐 거야. 봄이 오면 꽃이 피듯이, 우리도 결국 스스로 답을 찾게 되지 않을까?”
제이는 그녀의 말에 작은 위안을 얻었다. 그래, 삶도 계절처럼 흐르고 변화하는 거야. 언젠가는 내 길이 선명해질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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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제이는 정리하던 책들 사이에서 익숙한 제목을 발견했다. 『어린 왕자』, 『모모』, 그리고 『밤의 도서관』. 알베르토 망구엘은 도서관이 기억과 시간, 그리고 인간의 상상력이 모인 공간이라고 이야기했다. ‘도서관은 인간의 정신이 남긴 흔적이며, 우리가 존재했다는 증거다.’
제이는 이 문장을 곱씹으며, 자신이 매일 머무는 이곳이 단순한 업무 공간이 아님을 다시금 깨달았다.
그녀는 『어린 왕자』를 떠올렸다. 어린 시절 처음 읽었을 때, 여우의 말이 단순한 문장처럼 느껴졌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 깊은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이 문장이 지금의 그녀에게도 유효했다. 사서로서 그녀는 책을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고, 그들의 삶을 변화시킬 기회를 얻고 있었다.
며칠 전, 한 초등학생이 『어린 왕자』를 다 읽고 찾아왔다.
“사서님! 이 책 너무 좋아요. 다음에는 어떤 책을 읽으면 좋을까요?”
제이는 망설임 없이 『모모』를 추천했다.
“이 책은 시간을 빼앗긴 사람들을 돕는 소녀의 이야기야. 네가 읽으면 많은 생각이 들 거야.”
아이의 두 눈이 반짝였다.
“저 꼭 읽을래요!”
그 순간, 제이는 자신의 일이 단순히 책을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도서관은 사람들에게 지식뿐만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는 곳이었다.
그날 밤, 제이는 창밖을 바라보며 깊이 숨을 내쉬었다. 『밤의 도서관』에서 망구엘이 말한 문장이 다시 떠올랐다.
‘우리가 읽는 책은 결국 우리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다.’
창밖에는 어둠이 깊어졌고, 도서관의 불빛은 따뜻하게 빛났다. 그리고 그 불빛 아래에서, 마치 봄을 기다리는 나무들처럼, 또 다른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