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희 소설
초여름, 행복도서관 앞마당에는 바람이 잔잔히 불고 있었다. 햇살은 부드러웠지만 낮에는 제법 더워진 날씨였다. 이팝나무는 어느새 꽃을 다 떨구고 짙푸른 잎을 무성하게 뻗었고, 화단의 능소화는 주황빛 꽃망울을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도서관 마당 벤치에는 사람들이 하나둘 앉아 책을 읽거나, 잠시 쉬어가고 있었다. 창문을 열어둔 독서 공간에는 초여름 바람이 스며들어 부드럽게 책장을 흔들었다. 도서관 안은 언제나처럼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사연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오늘은 ‘베이비부머 세대를 위한 도서관’이라는 주제로 특별한 행사가 열리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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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는 아침부터 행사 준비로 바쁘게 움직였다. 행복도서관은 오랫동안 아이들과 청소년, 직장인들을 위한 공간으로 여겨져 왔지만, 이제는 점점 더 많은 베이비부머 세대가 도서관을 찾고 있었다. 퇴직 후 삶의 방향을 고민하는 사람들, 인생 후반전을 위해 배우고 싶은 사람들, 그리고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책 속에서 위안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강당에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50~70대의 중장년층이었다.
오늘의 강연을 맡은 강사는 정영민 박사. 60대 초반으로, 오랫동안 평생교육을 연구하고 시니어들을 위한 강의를 해온 인물이었다. 정영민 박사는 등나무색 리넨 셔츠에 베이지색 재킷을 걸친 단정한 차림이었다. 머리카락에는 희끗희끗한 새치가 섞여 있었지만, 날카로운 눈빛과 생기 있는 말투에서 그의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도서관에 모인 사람들을 천천히 둘러보며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오늘 ‘도서관과 함께하는 인생 2막’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러 왔습니다.”
그는 마이크를 손에 쥐고,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많은 분들이 은퇴를 하고 난 뒤, 마치 길을 잃은 것처럼 느낍니다. 퇴직 후 계획을 세우지 못하면 시간이 남아도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불안해지죠.”
사람들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퇴직 후엔 그냥 조용히 살고 싶어요.’ 하지만 여러분, 정말 조용히만 살고 싶으신가요?”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한쪽 테이블에 앉아 있던 김재석 씨를 바라보았다.
“저도 예전에 회사에서 30년을 근무하고 퇴직했을 때, 그 생각을 했습니다. ‘이제 좀 쉬자, 아무것도 하지 말자.’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았어요. 가장 위험한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더군요.”
누군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정 박사는 하얀 칠판에 붉은색으로 글자를 적었다.
‘삶은 계속된다.’
“여러분,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100세 시대입니다. 60세에 은퇴한다고 해도, 앞으로 30~40년은 더 살아야 해요. 그런데 그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시겠습니까? 아니면 새로운 도전을 해보시겠습니까?”
그는 관객들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여러분의 삶은 계속됩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그 첫걸음을 도서관에서 시작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강의를 진행하면서 참석자들의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마련되었다. 김재석 씨는 2년 전 은퇴한 후 처음에는 막막한 시간을 보냈다. 평생을 일만 하면서 살아왔기에, 정작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퇴직하고 나니 하루 종일 뭘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회사 다닐 때는 시간이 없다고 불평했는데, 막상 시간이 많아지니까 너무 적막했어요.”
그는 처음엔 신문을 읽으러 도서관에 오다가, 점점 책을 빌려 읽게 되었다. 주로 많이 읽는 분야는 역사였다. 책 속에서 역사의 흐름과 함께 살아가는 인물들의 모습을 보며,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되었다.
“나도 이 시대를 살아온 한 사람으로서,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
김재석 씨는 그날 이후 도서관을 더 자주 찾았고, 역사와 사회 문제를 다루는 독서 모임에도 참여하기 시작했다. 책 속의 이야기들이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지금의 삶과도 연결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말하지 못한 또 다른 고민이 있었다.
“가족들과 점점 멀어지는 기분이에요.”
퇴직 후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아내와의 대화는 점점 줄어들었다. 자녀들은 바쁘다는 이유로 연락이 뜸했고, 그는 점점 자신이 사회에서 소외된 존재가 되어가는 것만 같았다.
한편 도서관에 자주 오는 이정희 씨는 남편과 사별한 후 몇 년 동안 깊은 우울감 속에 빠져 있었다. 아이들은 각자의 삶을 살고 있었고, 집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나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하지?”
하루하루가 무기력하게 흘러가던 어느 날, 그녀는 도서관을 찾았다. 그리고 한쪽 게시판에서 ‘에세이 글쓰기 모임’ 모집 공고를 발견했다.
“나는 글을 써본 적도 없는데… 내가 할 수 있을까?”
망설였지만, 이대로 살아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시작된 글쓰기 모임에서,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의 삶을 글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남편과의 추억, 아이를 키우며 겪었던 일들, 혼자 남겨진 외로움까지. 그녀는 글을 쓰면서 조금씩 마음의 짐을 덜어내고 있었다.
“처음엔 내가 쓴 글이 너무 서툴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글쓰기 선생님이 그러시더라고요. ‘글은 잘 쓰는 게 아니라, 진심을 담는 것이 중요하다’고요.”
그녀는 이제 일주일에 한 번 글쓰기 모임에 오는 것이 기다려졌다. 도서관에서, 그녀는 다시 삶을 기록하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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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박사는 베이비부머 세대가 새로운 삶을 준비하는 데 있어 도서관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퇴직 후 가장 중요한 것은 배움과 관계입니다. 배움은 우리가 삶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고, 관계는 고립되지 않도록 도와주죠. 도서관은 이 두 가지를 모두 제공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이야기를 듣던 김재석 씨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정희 씨도 노트에 무언가를 적어가며 강연을 경청하고 있었다.
행복도서관에서는 이미 몇 개의 베이비부머 대상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다.
· 독서 모임 – 인생 책을 함께 읽고, 삶의 경험을 나누는 모임
· 에세이 글쓰기 –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자서전을 써보는 과정
· 취미 강좌 – 그림 그리기, 사진 촬영, 캘리그래피 등 창작 활동
· 디지털 교육 – 스마트폰, 인터넷 활용법, SNS 사용법 등 디지털 격차 해소
이 프로그램들은 그들에게 단순한 배움이 아니라, 삶을 다시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되고 있었다. 행사가 끝난 후, 제이는 강당을 정리하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초여름의 해는 천천히 넘어가고 있었고, 마당에는 부드러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도서관을 통해 새로운 인생을 살기 시작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도서관은, 그들의 두 번째 삶을 위한 문을 열어주는 곳이 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