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더워졌다. 여름옷을 꺼낼 때가 왔다. 겨울동안 함께한 두꺼운 옷들을 정리했다. 그동안 옷장을 어찌나 어지럽게 사용했는지 상의와 하의가 길을 잃은 채 한 곳에 뭉쳐있었다. 꽉 차서 겨우 닫힌 서랍장은 버거워보였다. 올 겨울도 나는 참 게을렀다. 어지러진 옷들을 전부 싹 쓸고 나서 깨끗한 빈 수납장을 마주했다. 새로 채워야 할 공간을 보니 설렜다. 기분 좋게 다시 여름 옷으로 깔끔하게 정리했다. 새로운 계절을 맞이할 준비가 되었다.
내일은 더욱 더워질 예정이라고 한다. 이미 내 옷장은 정리가 끝났으니 모든 것이 완벽하다. 산뜻한 기분을 느꼈다. 나는 이런 산뜻함을 정리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종종 마주치곤 한다. 특히 계획을 짤 때 그렇다. 나는 관심사가 많아서 배우고 싶은 것도 해보고 싶은 것들도 많다. 이 모든 걸 하기 위해 늘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처음 마음과는 다르게 나는 일을 미루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늘 새로운 계획을 세운다. 새롭게 계획을 짤 때마다 느껴지는 산뜻함은 과거의 일도 용서해주기 때문이다.
한때는 이 산뜻한 마음이 좋았다. 과거에는 계획을 잘 못 지켰어도 다시 잘 해 보자는 생각으로 계획을 세우면 없던 의욕도 생기기 때문이다. 그 순간만큼은 뭐든지 잘 될 거 같고 세상의 주인공이 된 것만 같다. 그때만큼은 슈퍼스타다. 괜찮아 잘 될거야라며 다가올 미래를 무한 긍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사람들이 나의 장점으로 긍정적인 모습을 꼽은 이유는 이 때문일지도 모른다. 계획과 실패, 그리고 새로운 계획의 무수한 반복 속에서 산뜻한 마음이 남들보다 빈번하게 싹텄을 거다. 하지만 마음가짐만 새롭게 하고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은 긍정이 그리 자랑스럽지가 않다.
그러다보니 이제는 계획 세울 때 느껴지는 산뜻한 기분이 불편하다. 산뜻함은 마치 이번엔 다를거라는 특별한 기대감을 심어준다. ‘왠지 이번엔 기분이 달라!’ 이 말만 29년째다. 산뜻함도 긍정도 늘 내실이 없었다. 그래서 이제는 산뜻함이 약간 호들갑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제는 호들갑떨지 말고 그냥 조용히 묵묵히 해야 할 일을 해나가고 싶다.
그래서 나는 해야 할 일을 매일 묵묵히 하는 사람들을 존경한다. 그들에게 종종 비결을 물어보곤 했다. 그러나 그들에겐 비결 따윈 없었다. 그들이 내놓는 대답은 늘 두 글자였다. ‘그냥.’ 나는 왜 그냥 하지 못하고 늘 호들갑을 떨었을까. 아마 나의 할 일이 그냥이 될 수 없었던 이유는 고민과 욕심 때문일거다. 계획을 세워놓고도 혹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을 했다. 그러면 지금 무엇을 해야 낭비가 아닐까 하면서 쓸데없이 고민을 했다. 또 시작한 일은 꼭 큰 열매를 맺길 바라는 욕심이 앞섰다. 욕심이 커지니 부담감 때문에 쉽게 일이 잡히지 않았다. 이런 잡념에 사로잡히면 해야 할 일들이 무척 어렵고 힘든 일 처럼 느껴졌다. 사실은 별게 아닌데도 말이다. 그래서 산뜻한 마음 같은 대단한 마음가짐이 필요했을거다.
고민과 욕심으로 점철되지 않은 일들을 묵묵히 하고 싶다. 시간낭비일까 걱정하지 말고, 잘 하고 싶다는 욕심도 내지 말고 그냥. 그래서 올 여름은 그냥 보내기가 목표다. 뭔가를 하겠다는 산뜻한 마음을 접고 해야 할 일들을 일상 속에 정리해본다. 밥을 먹고 양치를 하듯 일정 시간에 생각을 글로 써본다. 따라해 보고 싶은 디자인을 한 장씩 따라 해보려고 한다. 어디로 갈 지 모를 회사를 위해 자기소개서 한 단락을 쓴다. 그렇게 여름을 보내다보면 금방 겨울이 오겠지. 또다시 옷장을 정리할 땐 어떤 마음을 느낄까. 여름옷을 정리하면서는 산뜻함 보다는 묵묵히 지내온 날들에 미소가 지어졌으면 좋겠다. 정리해둔 얇은 여름옷 한 장 한 장에 묵묵함이 베이도록 산뜻함을 쫙 빼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