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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닷빛 Nov 11. 2022

이 그림은 뭘까요?

언어능력 평가 통역 후일담

퀴즈: 아래 사진 속 빨강과 흰 줄무늬가 있는 것을 뭐라고 부를까요?


Photo by Spencer Imbrock on Unsplash


답은 차양.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차양(遮陽)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햇볕을 가리거나 비가 들이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처마 끝에 덧붙이는 좁은 지붕.≒챙."


영어로는 awning이라고 한다.

옥스퍼드 대사전(Oxford Dictionary)의 정의는 아래와 같다. 
"a sheet of canvas or other material stretched on a frame and used to keep the sun or rain off a shop window, doorway, or ship's deck.


이 정도면 1:1 대응어라고 할 정도로 딱 들어맞는다.


그런데 누군가 저 사진 속 물건을 '천막'이라고 표현한다면?
맞는 말일까? 틀린 말일까? 이때 '천막'을 다시 영어로 옮겨야 된다면 뭐라고 해야 할까? 

오늘 통역을 하면서 맞닥뜨린 문제다. 

===
전에 투렛 증후군을 앓는 한국인 학생을 위해 열린 학교 회의를 통역했는데 오늘은 학교 언어치료사의 연락을 받고 그 학생의 언어 능력 평가를 통역했다. 검사는 간단했다. 그림을 보여주고 그에 해당하는 단어를 듣고 검사지에 체크를 하는 형식이었다. 내가 할 일은 학생에게 하는 언어 치료사의 질문을 한국어로 통역하고, 학생이 한국어로 답하면 그 단어를 영어로 옮겨 주는 일이었다. 


그림을 보고 뭔지 대답하라는 지시는 옮기기 쉬웠다. 학생도 그 정도는 알아들어서 통역이 별로 필요하진 않았다. 그러나 역시, 통번역에서 방심은 금물. 함정은 곳곳에 있다. 그 대표적 사례가 바로 저 '차양'이었다. 


위에 올린 사진과 유사한 검사지 속 그림을 보고 그 학생은 한참을 머뭇거렸다. 그러고는 '천막'이라 답했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일단은 본능적으로 'tent'라고 통역했다. 그러나 저 사진을 보고 떠올린 천막이라는 단어와 tent 사이의 거리는 너무 멀었다. '천막'을 말 그대로 직역하자면 fabric cover이고 tent라고 가장 많이 번역되곤 하지만 저런 식의 차양을 지칭하는 말에도 쓸 수 있을 것 같다고 부연 설명을 했다. 또 한국에서는 차양이라는 단어를 여기서 awning을 쓰는 것만큼 자주 쓰지 않을 것 같다는 문화적 맥락도 덧붙였다. 이 글을 쓰면서 방금 아이폰 사전을 찾아보니 천막에 (배의) 'awning'이라는 항목도 나오긴 한다....


검사지에서 요구하는 정답이 다분히 보여서 더 조심스러웠다. 언어치료사가 워낙 '가볍게' 이야기해서 나도 별다른 생각이 없이 봉사하는 마음으로 왔는데 난이도가 확 올라가는 느낌이었다. 


핀셋을 나타내는 그림은 '집게'라고 대답해서 일단은 'tongs'라고 통역하고 핀셋에 대응하는 단어는 forceps라는 단어일 것 같지만 그렇게 정확한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았다는 말을 조금 덧붙였다. 때로는 나도 뭔지 알 수 없는 것도 있었다. 이를테면 포크의 아래 뾰족한 갈래 부분을 가리키는 데 학생은 포크라고만 하다가 나중에는 '창'이라고 답했다. 일단은 'spear'라고 직역을 하고 또 미진한 감에 덧붙이고 말았다. "저도 궁금해서 물어보는 데 이걸 영어로는 뭐라고 부르나요?" 답은 prong. 조금 허무했다. 아... prong은  그냥 뾰족하게 튀어나온 걸 지칭하거나 사슴뿔이라고만 생각했지 포크의 아래 부분을 지칭한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 해리포터 아빠 제임스 별명 아닌가요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지금 혹시나 하고 찾아보니 아이폰 사전에 포크 등의) 뾰족한 끝이라는 정의가 나온다. 역시... 꺼진 불도 다시 보고 아는 단어도 다시 봐야 하나 보다. 한국어에서 포크의 아래 부분을 따로 말하는 명칭이 있을지도 잘 모르겠다고 덧붙였는데... 나만 그런가? 


그렇다면 여기서 다음 퀴즈:

아래 사진은 무슨 물건일까요? 


정답은 clamp. 검사에서 이와 유사한 그림을 보고는 학생이 (다행히) 아예 모른다고 대답했다. 나도 이 그림만 보고는 clamp라는 단어를 영어로도 한국어로도 떠올리지 못해서 검사가 끝나고 물어봤다. 저게 대체 뭔가요? 지금 사전을 찾아보니 한국어로는 '죔쇠'라고 한다. 그 아래 예문을 보니 그냥 클램프로 더 많이 쓰이지 않을까 싶다. (이거 역시 나만 모르는 걸까?) 


나도 고개를 한참 갸웃거렸던, 지금까지도 뭔지 모르겠는 쇠로 된 무언가는 "무쇠"라고 해서 steel이라고 했다가 iron으로 황급히 바꿔 통역했다. (이 글을 쓰는 지금에야 iron과 steel의 차이가 뭔지 다시 검색해 보고 있다... 휴.) 


상형문자(hieroglyph)를 보여주는 그림은 학생 본인이 "pictures"라고 대답해서 그대로 넘어갔다. 쳇. 그건 잘 통역할 수 있었는데... 


===


번역(통역)에서는 필연적으로 놓치는 것들이 생긴다. 단어들은 생각보다 의미망이 커서 1:1로 대응이 안 될 때가 많고, 독자라는 과녁 자체가 빗겨나가 있을 때도 있고, 때로는 원문에 구멍이 있을 때도 있다. 결국 번역이란, 그렇게 필연적으로 빗겨나가는 과녁에 뾰족하게 갈고닦은 창을 던지는 일이 아닐까. 그 과정에서 번역자는 출발어와 도착어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든 줄이려고 안간힘을 쓴다. 


오늘처럼 1:1로 대응될 단어들을 옮기는 경우도 이렇게 어려운데, 긴 텍스트를 번역하는 경우에는 머뭇거리게 되는 지점이 한둘이 아니다. 여러 가지로 표현 가능한 선택지 중에 해당 문맥에서 해당 어휘에 상응하는 가장 적확한 단어와 표현을 골라내는 것. 그러려면 출발어와 도착어 실력을 섬세하고 적확하게 갈고닦아야 한다. 한 단어의 문화와 역사와 뉘앙스를 파악하고, 오늘 같은 경우 사용 빈도까지 염두에 두어야 한다. 당연히 골라낼 수 있는 단어와 표현을 내 안에 많이 갖고 있어야 한다. 또 필요할 때 이를 잘 끄집어내어 쓸 줄 알아야 한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너무 다 설명하려고 해서도, 그렇다고 또 너무 다 생략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원문과 해당 독자를 잇기 위한 적당한 지점의 타협이 늘 필요하다. 이 과정은 번역을 진지하게 마주한 지 10년이 지난 지금도, 늘 어렵다. 


다시 차양으로 돌아가 보자. 내가 말해놓고도 'awning'이란 단어가 어떻게 내 머릿속에 들어와 있는지 궁금했다. 갑자기 떠오르는 통번역대학원 숙제. 리가(라트비아의 수도) 여행기를 번역하는 것이었는데 도시의 외관을 묘사하는 단어들이 잔뜩 나왔다. 내친김에 아직 간직하고 있는 숙제를 꺼내 본다. 엇. awning을 여기서 본 건 아니네. 거기에 등장하는 ledges, lintels, window boxes 등을 찾아보다가 알게 되었던 걸까? 여하튼 언젠가 걷어 올려 고이 간직해두었던 그 단어를 오늘에야 꺼냈다. "심 봤다!" 외치고 싶은 심마니의 심정이지만, 심마니와는 결정적으로 다르다. 오늘의 내가 캐낸 그 인삼을 심은 것도 과거의 나니까. 씨를 뿌리고 수확하는 농부에 가까우려나. 다음 번 세션에서는 뭘 어떻게 캐내게 될까, 긴장감 도는 기대를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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