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와 고통'하는' 인간

고통을 끌어 안는 주체적인 실체

by 우연과 상상

12월도 하순에 접어들고 있다. 매일 엇비슷해 보이는 하루가 모여 어느 새 한 해를 이루었다. 기록을 하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엇비슷하다고 생각했을 하루들. 그래서 귀찮지만 되도록 글을 쓰려고 한다. 오늘은 어제와 다르다는 걸 악착같이 증명하고 싶은 마음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제는 마음산책 출판사에서 기획한 신형철 작가의 강의를 들었다. 그 생각으로 며칠 기분이 좋았다. 좋아하는 작가는 많지만 한결같이 좋은 글을 쓰는 작가는 매우 드물다. 사람이라면 그게 당연한 것이라 생각하기에, 때때로 좋아하는 작가의 글을 읽으며 실망할 때도 있지만, 그 일시적인 실망감 때문에 작가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지는 않는다. 그런데 신형철 작가는 한결같이 좋은 글만 쓴다. 그의 글은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다. 조금 못 써도 전작들로 인해 까방권을 획득해놓은 상태라 나는 그가 쓴 글이라면 무조건 읽을 각오가 되어 있는데 그가 글을 계속 잘 쓰는 바람에 까방권을 쓰지 못했다. 그럴 법도 한 것이 그의 책에 이런 말이 나온다.

"자부도 체념도 없이 말하거니와, 읽고 쓰는 일은 내 삶의 거의 전부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부풀리는 유의 사람은 절대 아니다. 그렇다고 정직하게 말하지도 않는다. 그는 축소한다. 자신의 글을 조금은 부끄러워하는 듯도 하다. 이렇게 글을 잘 쓰면서도 항상 부끄러움을 느끼는 작가가, 그래서 자신의 책이 선뜻 좋다고 홍보하지 못하고 '덜 밉다'고 말할 뿐인 작가가 글쓰기가 전부라고 말하는 건 진짜 전부인거다.


그가 강의하는 카프카를 들으며 나는 잠시 일상을 벗어난다. 강연이 아니었다면 뉴스를 보거나 귤 까먹으며 뒹굴거렸을 평일 저녁에 카프카라는 세계로 여행을 떠난다.


카프카의 소설에서 인간은 '어느 날 아침(실제 소설에 나오는 단어다)' 갑자기 갑충으로 변신하고, '어느 날 아침' 갑자기 끌려가 죽고, 갑자기 아버지가 결혼을 반대해서 죽는다. 내가 읽은 카프카의 소설은 어느 날 아침 갑충으로 변한 그레고리 잠자의 이야기 <변신>이 전부지만, 그가 설명하는 다른 소설들의 줄거리를 들으면 비슷하게도 보인다. 신형철 평론가는 카프카의 소설에 대해 어느 날 갑자기 선고당하고, 집행되는 이야기라고 했다. 누가 들어도 부당하게 느껴지는 선고임에도 이유도 모르고 집행당하는 인간들. 그것은 카프카가 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었다. 인간은 아무런 인과도 없이 갑자기 큰 사고가 나서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억울한 일을 당할 수도 있고, 범죄자로 몰릴 수 있다. 세상은 통제할 수 없고, 부조리한 일들이 일어난다. 해석될 수 없는 고통을 끌어안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 인간의 운명인 것이다. 우리는 모두 고통 받는 존재다.


며칠 전 돌아가신 외숙모가 생각났다. 젊은 나이에 돌아가신 외숙모에 대한 안타까움도 물론 있지만, 남은 가족들을 떠올리면 안타까움을 넘어서 세상이 원망스럽다. 왜 삼촌은, 동생들은 하루 아침에 엄마를 잃어야 하는가. 왜 작별인사를 나눌 찰나의 시간도 주어지지 않았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해석되지 않는 고통. 카프카의 소설에는 이렇게 갑작스런 선고를 받아 집행되는 인물이 자주 등장한다. 그렇다면 카프카는 왜 이런 인물들을 그려냈을까. 신형철 평론가는 이렇게 해석한다. 처음부터 세계에 승리를 내주는 무기력한 희생자, 완벽하게 패배하는 인물을 그려 애초부터 세상과 인간은 게임이 안 된다는 걸 보여줌으로써 이 게임 자체가 말이 안 된다는 걸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거라고. 못 이긴다고. 철저히 패배하고 견디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카프카의 전략이라고 했다.


그는 덧붙여 말했다. 세상이 그렇게 암울하기만 한 건 아니라고 반박하고 싶은 사람들도 있을 거라고. 작지만 확실한 행복들이 있고, 충분히 살만하다고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는데... 그러나 신형철 평론가는 카프카가 위악적으로 그런 글을 쓴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게 진실이기 때문에 그것밖에 못 쓰는 작가들이 있는 것 같다고. 예로 최승자 시인의 이름이 나왔을 때 그게 무슨 뜻인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그들이 세상을 비관적으로 느끼는 이유는 개인의 단위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인류의 단위로 생각해서란다.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전쟁, 난민, 기아... 인류의 단위로 생각하면 세상은 비극이 맞다.


언젠가 인문학 수업을 들을 때 공감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세상에는 인간 뿐만 아니라 비인간들에게 공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여기저기서 '공감'능력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들으면 들을수록 아닌 것 같은 거다. 비인간들에게까지 공감을 하면 마음이 아파서 어떻게 살까 싶은거다. 그래서 선생님께 질문했다.

"공감을 잘할수록 살기 더 힘들어지는 거 아닌가요?"

그랬더니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맞다."

공감의 범위가 범인들에 비해 훨씬 넓은 몇몇의 작가들은 세상을 부조리하고, 무의미하고, 절망적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카프카는 왜 이런 세계를 굳이 그리려고 했을까. 화장으로 겨우 감춰놨던 맨 얼굴을 보여줘야만 했을까. 신형철 평론가는 '고통 하는 인간'이라는 표현을 쓴다. 우리는 일방적으로 고통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견디며 산다. 감내한다. 그래서 고통 하는 인간이고, 절망과 대결'하는' 모습에서 위안을 얻는다. 현실이 절망적인데 문학을 통해 더 깊은 절망을 보여주는 것이 어째서 위안이 되는가. 나만 그런 것은 아니구나,하는 자기 위안을 넘어서는 의미를 찾고 싶었는데 잘 이해했는 지는 모르겠지만 조금은 힌트를 얻은 것 같다. 고통을 감내하는 주체가 나라는 것, 고통이 나를 집어 삼키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고통을 견디고 있다는, '주체성의 회복'이 카프카의 소설로부터 위안을 얻게 되는 이유가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신형철 작가는 희망은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찾는 것이라는 이야기로 강연을 마무리했다. 글에서 희망을 찾으려는 건 손 쉽게 고통을 털어내려는 게으름일지도 모른다고. 고통은 거저오는데(그리고 감내까지 해야하는데!), 희망은 거저오는 법이 없으니 찾으러 나서야 한다니... 인간으로 산다는 게 난이도 최상이구나 싶지만, 이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희망을 찾기 위해 보고, 듣고, 읽는 것보다 작은 실천이 더 중요하다.


강연을 들은 뒤 두 문구가 기억에 남는다. 고통 '하는' 인간. 희망을 찾기 위한 작은 실천. 카프카의 작품에 대해 더 깊이있게 공부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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